[칼럼] 누구로 사는 건 내 선택이다

이영숙 시인 2025. 10. 2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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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한강 작품 중 맨 처음에 읽으면 좋을 『희랍어 시간』을 맨 마지막에 읽고 이제 그의 작품들을 덮는다. 0도 근처에서 차갑게 끓어오르는 글쓰기의 언저리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세속의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는 이소연 문학평론가의 평에 한동안 붙들린다.

 한강 작품 전반에 드리운 데카당스 요인들, 기존 통념에 붙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신생 언어와 사고, 자신만의 시간과 제 그림자에 입 맞추며 써 내려간 그의 문학은 뼈마디 통째로 드러낸 해골 문학이다. 그 작품 속 전반은 '하얗게 드러난 관절 같은 바위' 언어들이 즐비하다.

 우리나라 문학인 중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라서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알고자 서재에서 함께 울며 아파했던 어둠 속 시간과 이제는 작별해야 할 것 같다. 심리학과 철학의 경계까지 넘나들며 뼈마디 그대로 드러낸 그의 문학을 훑는 동안 내 몸과 영혼의 뼈마디에도 새살과 근육을 입혀야 한다.

 말을 잃어가는 희랍어 수강생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가 나누는 영혼의 대화, 그들이 뜨거운 심장으로 나누는 빛의 대화가 부러웠던 시간만 독서록에 살점으로 기록해 둔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한강, 『희랍어 시간』, 105쪽)

 눈을 잃어가는 남자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 희랍어 수강생이 주고받은 이야기 중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왜 철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나에게 물은 적 있지. 내 생각을 정말 듣고 싶니?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다는 남자의 진술은 어쩌면 한강 자신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미약한 빛마저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의 결핍과 그곳에서 생성된 독을 하얗게 드러난 관절 같은 것들로 승화한 작품 전반이라 아플 수밖에 없고 그 어둠을 걷어내 빛으로 제시한 그의 문학을 나는 감히 정신과 의사로서의 '데카당스 문학'이라 진단한다.

 시대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결핍이나 독은 불가항력이지만, 대체로 모든 것은 자신 안에서 생성된다. 한강의 작품 전반에 드리운 '서늘하게 식어버린 어둠'이 '흰'으로 승화되는 세상이 온다면 정치형 인물들의 박제된 양심은 다시 살까?

 '희랍어 시간' 눈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주인공에게 의미 있는 상징이다. 그리스는 햇빛 눈 부신 민주주의 시원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사멸된 그리스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려는 주인공 남자와 여자는 기존 통념을 뒤엎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려는 데카당스 문학의 주인공들로 보인다.

 누구로 사는 게 선택이라면 나는 주로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하는가. 지금, 이 삶으로 길을 낸 지난 세월 눈과 입이 한 역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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