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끄집어내는 '치실' 같은 소설 쓸래요"
'임장 데이트' 즐기는 남자
시험지 유출 원하는 학생 등
강남 도시인 그린 9편 담아
"오르내리고 흔들린 사람들
'지금, 여기'에 대해 쓸것"

그 모임에선 실패도 실력이었다. 근사한 실패담으로 주목을 끌어야 모임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 신입 변호사인 '나'는 영화사 대표, 갤러리 관장 등 세련된 청중 앞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입을 연다. 룰은 이랬다. '상대의 실패담을 끝까지 듣되, 어떤 충고도 하지 않을 것. 박수만 칠 것.'
그런데 '나'의 실패담이 진행되자 모임의 수장이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다"며 말허리를 잘라버린다. 타인의 실패조차 취미로 관람하는 이 특권층 모임의 진의를 '나'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방금 '나'는 가장 크게 실패했다.
정이현 소설가의 단편 '실패담 크루'의 설정이다. 지난 23일 서울 중구 매일경제에서 만난 정 작가는 "실패가 성공의 반대는 아니지만, 실패를 실패담으로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떤 권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임을 말해보고 싶었다"면서 "실패를 통해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바탕으로서의 실패가 아닌, 실패조차도 담백하게 향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며 웃었다.
'실패담 크루'를 시작으로 단편 9편을 엮은 그의 소설집 '노 피플 존'(문학동네 펴냄)이 출간됐다.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로 45만부(86쇄)의 판매고를 올린 스타 작가,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만 33세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음습하거나 초현실적인 처소가 아닌, 되레 '서울 강남구'를 거점 삼아 '도시인의 현대성'을 조명해왔다. 출간 이틀 만에 중쇄에 돌입한 이번 책 역시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잔뜩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지금, 여기'에 대해 써왔어요. 23년 전 데뷔 땐 2002년을 썼고, 지금은 2025년을 쓴다는 점만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진짜 실패'를 말해선 안 되는 크루(모임)라는 독특한 설정의 위 소설을 비롯해 다른 수록작들도 거울을 들여다보듯 흥미롭다. 그 거울상엔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 가장 밝은 낯빛이지만 실은 어두운 속내로 이지러진 사람들이 나온다. 예컨대 단편 '사는 사람'에는 학원 시험지 유출 1회당 10만원을 주겠다는 중학생, 당장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듯이 최상급지만 골라 '부동산 임장 데이트'를 즐기지만 실은 빈털터리인 남자가 나온다. 제목처럼 중학생은 시험지를 '사고', 남자는 아파트를 '사는' 구도인데 그 중심엔 두 사람과 이질적 관계를 맺는 학원 실장 '나'가 있다.
"미성년자의 시험 성적도, 다 큰 어른의 아파트도 모두 서열화되니 두 사람은 열패감을 느껴요. 연봉은 얼마고, 코인은 올랐는지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탁자에 오르는 세상이잖아요. 구조적 분석보다는 이런 모습 속의 현대인을 보여주려 했어요. 세상 한복판에서 흘러가 버릴 수 있는 감정을 포착하는 것이 단편소설일 텐데 저 아래 구조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좋은' 소설을 쓰고 늘 쓰고 싶어요."
서른 나이에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데뷔해 작가적 명성을 얻은 그도 후배들이 올려다보는 중견 작가가 됐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아이의 성화에 강아지 '루돌이'를 입양하기도 했다. 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해도, 삶은 때로 소설이 된다. 체험과 경험을 '복붙'하듯 끌어다 쓰진 않지만 삶의 가장자리에서 느낀 외딴 감각은 소설 중심부에서 자주 변주된다.
문학과 동떨어져 보이는 삶에서 느낀 감각을 문학으로 쓰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가 현재, '지금, 여기'를 살아가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책 맨 끝 '작가의 말'에 자신이 쓰는 소설을 "'치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쓴 이유다.
"언어가 실이라면 제 소설은 다른 어떤 실보다도 치실에 가까웠으면 해요. (웃음) 보이지 않는 틈새를 기어이 끄집어낼 수 있으니까요. 얇고 매끄럽고 실용적인 실과 같은, 실상은 많은 용도를 갖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문학적 골방'의 풍경을 "옥수역에서 압구정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내부"로 은유했다.
"땅 위의 옥수역에서 한강을 지나면 다시 땅 밑으로 내려가는 압구정역, 그 지하철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를 전혀 모르는 도시인들이 자신의 폰만 들여다보면서 몸을 부딪치고 있어요. 제가 쓰는 소설은 바로 그런 모습들이에요. '오르내리고' 또 '흔들리면서' 함께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 그 모습을 소설 안에 담고 싶어요."
[김유태 기자 / 사진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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