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재시동…수탁법인 책임 강화 착수
수탁자 충실의무·공시 강화 검토…금융권 반발·가입자 거부감도 과제
![[게티이미지뱅크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6/ned/20251026133949106rcxa.jpg)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정부가 회사와 별도의 수탁법인을 설립해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본격 추진한다.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이 원리금보장형에 치중돼 연 2%대 저수익 구조에 머물면서, 영미권처럼 독립된 수탁법인이 기금을 운용하는 ‘기금형’으로 전환해 경쟁과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다만 기금형 제도의 핵심인 수탁법인의 책임과 의무를 국내 실정에 맞게 규정해야 하고, 금융권 반발 등 현실적 장애도 만만치 않아 제도화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6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수탁자 책임 확보 방안’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431조7000억원에 달하지만, 이 중 356조5000억원(82.6%)이 원리금보장형에 집중돼 있다. 실적배당형은 17.4%(75조2000억원)에 그친다.
이 같은 구조 탓에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2.31%로, 노후소득 보장 기능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기금형은 사용자와 근로자가 함께 규약을 정하고, 별도 기금운용위원회와 수탁법인을 설립해 자금을 통합 운용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호주 등 영미권에서 보편화된 구조로, 전문 투자 역량을 가진 법인이 대신 자산을 운용하고 수익을 가입자에게 배분한다. 정부는 이를 통해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히고 시장 경쟁을 촉진한다는 구상이다.
계약형 퇴직연금이 2005년 도입된 이후 20년이 지나며 초기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업자 간 유치 경쟁이 끝난 뒤에는 운용이 소극적으로 변했고, ‘묶인 돈’이 된 퇴직연금이 시장에서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기금형 도입은 기존 계약형과 병행되는 선택지로, 보다 다양한 운용 모델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금형 논의는 2014년, 2016년, 2019년에도 추진됐지만 금융권의 반발로 무산됐다. 정부는 올해 3월 ‘기금형 퇴직연금 자문단’을 출범시키고 제도 설계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 연구는 기금형 제도의 전제 조건인 수탁법인의 책임·의무 규정을 구체화하기 위한 단계다.
노동부는 “기금형에서는 제3자가 퇴직금을 운용하고, 그 손익이 노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수탁자의 책임이 핵심”이라며 “독립적 지배구조와 감독체계를 통해 책임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ERISA)’을 통해 수탁자의 충실의무를 법으로 명시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민사소송·수탁자 지위 박탈 등의 제재를 부과한다. 한국도 수탁자 제재와 공시 의무 강화 등 유사한 장치를 검토 중이다. 현재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상 운용수익률·수수료 등 기본 정보만 공시하도록 돼 있으나, 향후에는 운용성과·위험관리체계 등까지 공개 범위를 넓히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모든 손실을 이유로 수탁자를 제재할 경우 운용 위축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만 제재를 가하는 ‘가이드라인형 책임제’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도 정착을 위해선 모범 기준 제시와 판례 축적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 교수는 “영국 등도 초기에 판례를 통해 충실의무 개념이 정립됐다”며 “한국도 우선 모범 기준을 만들고 시행하며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 세계적으로 퇴직연금의 80% 이상을 원리금보장형에 넣는 국가는 한국뿐”이라며 “퇴직연금의 ‘갈라파고스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기금형 도입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기금형 도입의 현실적 난관도 적지 않다. 금융권에서는 기금형이 본격화되면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의 역할이 축소될 것을 우려해 반발하고 있다. 일부 근로자들 역시 “퇴직금을 모아 투자한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 크다.
노동부 관계자는 “기금형은 기존 제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라며 “충실한 제도 설계를 통해 가입자 신뢰를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연구 용역 결과를 토대로 내년 상반기 중 구체적인 입법 방향을 검토할 계획이다. 제도 설계부터 법 개정, 이해관계자 협의까지 거쳐 실제 시행까지는 중장기 과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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