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27살에 죽었네” 비쩍 마른 몸, 시커먼 눈화장…중독과 폭력 속 자기파괴로 뒤섞인 천재의 이야기 [음덕후:뮤지션으로 읽다]

김주리 2025. 10. 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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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2006년 ‘백 투 블랙’(Back To Black) 발매
발매와 함께 폭발적 인기…타고난 음악 재능과 개성 강한 목소리로 세계적 스타 반열
불우한 가정환경·중독·자기파괴적 성향…약물 및 알코올 중독으로 27세 일기로 요절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콘텐츠
“I died a hundred times”
(난 이미 100번은 죽었어)
- 에이미 와인하우스, ‘백 투 블랙’ 中 -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한 인간의 삶은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그의 음악은 절정에 가까운 완성도로 빛났다. 이 간극은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다. 음악은 살아남았고,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일상을 누비며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그녀는 무엇을 노래했고, 무엇에 쓰러져 갔을까.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창문. 축축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 온 햇빛이 방 안에 희미하게 드리운다.

침대 위 매트리스와 바닥에 널브러진 빈 술병들, 어깨끈이 흘러내린 파티 트레스를 입은 채 시커멓게 마스카라가 번진 눈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숨 고를 틈 없이 술병째로 한 모금을 들이킨다.

방 안에는 ‘백 투 블랙’(Back To Black)이 흐르고 있다.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예술은 때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우리는 예술이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을 충만시킨다 믿어왔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정을 승화시키며, 삶을 버티게 만드는 숭고한 인간 미학의 결정체라고.

그렇다면 예술은 정말 ‘모두’를 구원했을까.

고통을 노래하는 순간 음악은 빛을 얻고, 무대 위에 선 창작자는 흡사 절대자의 위치로까지 올라선다. 하지만 이따금, 예술은 무대를 밝히는 단 한 사람, 예술가 자신만은 끝내 붙잡지 못한 채 비극을 남긴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이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한 인간의 삶은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그의 음악은 절정에 가까운 완성도로 빛났다. 이 간극은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다. 음악은 살아남았고,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일상을 누비며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예술이 삶을 구하지 못한 순간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한다. 그녀는 무엇을 노래했고, 무엇에 쓰러져 갔는가.

“They tried to make me go to rehab, but I said, ‘No, no, no’
I don’t ever wanna drink again
I just, ooh, I just need a friend
I’m not gonna spend ten weeks”
(사람들이 나를 중독재활원에 보내려 하고 있어, 싫어! 싫어! 싫다고!
다시는 술 마시지 않을게요
저는 그저, 저는 그저 친구가 필요해요
재활원에서 10주라니, 절대 그럴 수 없어!)
- 에이미 와인하우스 ‘르헵’(Rehab)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등장은 2000년대 중반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물두 살에 발매한 ‘프랭크’(Frank)가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낸 것에 이어 희대의 명반으로 꼽히는 두 번째 앨범 ‘백 투 블랙’은 그래미 5관왕이라는 전례 없는 음악적 성취를 이뤄냈다.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삶보다 빨랐던 성공의 속도…붕괴된 사랑과 충족되지 못한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마비’시키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등장은 2000년대 중반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물두 살에 발매한 ‘프랭크’(Frank)가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낸 것에 이어 희대의 명반으로 꼽히는 두 번째 앨범 ‘백 투 블랙’은 그래미 5관왕이라는 전례 없는 음악적 성취를 이뤄냈다. 검은 재즈의 깊이와 소울의 체온, 여기에 레게와 R&B 프레이징이 삐딱한 듯 조화롭게 섞여 있는 보컬은 수십년 전 유행하던 ‘낡은 장르’들을 현재형으로 끌어올렸다.

대중 또한 그녀에게 반응했다. 아티스트의 카리스마를 강렬하게 뿜어내며 익숙한 듯 들어본 적 없는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젊은 뮤지션에게 관객은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음악적 성공이 정점으로 치닫던 순간, 그녀의 삶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추락해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삶을 갉아먹은 불안정한 가족 관계과 애착의 결핍, 스포트라이트를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빠르게 찾아온 명성, 그리고 중독적 사랑으로 번진 연인과의 관계가 만든 감정적 불안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기반과 좌표를 잃어버려 방황하게 했고, 끝내 그녀를 고립시켰다. 감정은 건강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채 일그러진 형태로 부유했고, 그녀는 무너져가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더욱 격렬한 방식으로 몸부림치며 붕괴되어 갔다.

이때, 와인하우스가 선택한 방식은 ‘치유’가 아닌 도피, 아니, 오히려 ‘마비’에 가까웠다. 알코올과 약물, 강박적 회피, 반복되는 자해적 선택은 일탈이 아닌 이미 판단력을 잃은 그녀가 택한 생존 체계였으며, 불안과 공포는 처리되지 못한 채 그대로 그녀의 몸과 혼에 남았다. 그녀의 하루 중에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무너져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무너짐 속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과 곤두 선 감수성의 영향인지, 그녀의 음악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보다 더 날 것의 운율을 띄어갔다. 그렇기에 듣는 이들은 그녀의 음악과 목소리에서 더욱 강렬한 매력과 공감대를 느꼈다.

그렇게 예술은 깊어졌고 삶은 부식됐다.

“You go back to her
And I go back to
Black, black, black, black
Black, black, black…”
(그래, 너는 그녀에게 돌아가
나는 내가 있던 어둠으로 돌아갈게
어둠으로, 암흑으로, 빛이 없는 곳으로…)
- 에이미 와인하우스 ‘백 투 블랙’ 中 -
하지만 음악적 성공이 정점으로 치닫던 순간, 그녀의 삶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추락해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삶을 갉아먹은 불안정한 가족 관계과 애착의 결핍, 스포트라이트를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빠르게 찾아온 명성, 그리고 중독적 사랑으로 번진 연인과의 관계가 만든 감정적 불안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기반과 좌표를 잃어버려 방황하게 했고, 끝내 그녀를 고립시켰다.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또 피투성이로 경찰서 출석한 부부”…불안으로 변질된 미성숙한 감정, 폭력으로 변질된 불안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2007년 블레이크 필더-시빌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은 사랑은 애초에 사랑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일부 현지 평론가들에 따르면 와인하우스의 감정은 ‘함께 있고 싶다’는 애정과 유대감을 기반으로 한 열망이 아닌 ‘버려지지 않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두려움에서 출발했다. 그녀가 원한 건 충만하고 친밀한 관계가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연대가 아닌 소유, 안정이 아닌 증명이었다. 그 사랑에는 연인을 향한 믿음보다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가 더 컸고, 그 공포는 집착으로 변질됐다.

문제는 이 결핍이 그녀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켰다는 데 있었다. 애착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더 불안해졌고, 불안이 깊어질수록 이들 부부의 사랑은 더욱 폭력적인 형태를 띄어갔다.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경찰서에 출석하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며 와인하우스의 자해흔이 파파라치에 의해 포착된 적도 다수다. “나를 버리지 말라”는 절규는 “너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기 부정으로 이어졌고, 그녀의 사랑은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가 아닌 자기 파괴적 감정 순환으로 바뀌어 갔다.

이 폭주하는 감정의 끝에서 그녀가 선택한 방식이 결국 ‘현실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다루기에 너무 여리고 예민했고, 너무나 크게 성공했고, 이 모든 상황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사랑이 떠날까 두려워 탈출하지 못했고, 사랑을 붙잡아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감정은 소화되지 못한 채 독이 되었고, 그녀는 그 독을 순간만 잊게 해주는 마취제 형태로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알코올, 약물, 마약 따위가 그것이었다.

즉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사랑은 비극이자 증상에 가까웠다. 버림받지 않으려다 스스로를 소진시켜버린 감정,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내면. 그것이 우리가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기묘한 공허와 고통의 정체다.

“I cheated myself
Like I knew I would
I told you I was trouble
You know that I‘m no good”
(난 나 자신을 속였어
내가 그럴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
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말했잖아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거 알고 있잖아)
- 에이미 와인하우스, ‘쓸모없는 인간’(You Know I’m No Good)
와인하우스의 노래는 자기처벌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그 안에서 감정을 ‘폭로’의 형식으로 내던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핍으로, 관계는 공포로, 감정은 자기혐오로 변질된 상태에서 노래라는 행위는 그녀에게 혼돈을 배출하는 창구였다.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정서의 파동이 긁혀 나온 ‘목소리’…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천재의 영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목소리는 테크닉적으로도 훌륭했지만 감정을 담아내는 세련된 듯 투박한 방식이 높은 평가를 받곤 했다. 음을 다루기 위해 정서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넘쳐흐른 자리에 음이 따라 붙는 방식으로, 기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뚤어진 불안정과 움푹 파인 질감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매력이 그녀 노래의 백미로 평가 받았다. 깔끔하지 않은 호흡, 거칠게 쓸린 비브라토, 때때로 흔들리는 강약 조절은 역설적으로 ‘삶의 잔해가 담긴 목소리’를 표현하며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여기에 자기고백적 성격이 담긴 와인하우스의 노래는 이중적으로 자기처벌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그 안에서 감정을 ‘폭로’의 형식으로 내던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핍으로, 관계는 공포로, 감정은 자기혐오로 변질된 상태에서 노래라는 행위는 그녀에게 혼돈을 배출하는 창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를 위한 해결책이 아닌 스스로를 향한 고발, “나는 망가졌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무너지고 있다”의 형태를 강하게 띄고 있었기에, 자기 자신을 끌어내림으로 스스로의 비탄을 재확인하는 방식의 감정 폭로는 그녀 내면의 생채기를 더 깊게 새겨버렸다.

그렇기에, 음악은 잠시 그녀를 버티게 했지만 치유하지 못했다. 목소리와 노래는 남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절제와 처절함을 오가는 목소리가 담긴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바로 이 역설에서 비롯된다. 예술은 영속됐지만 인간은 휘발됐다. 음악은 살아남았고, 인간은 구원받지 못했다.

음악은 잠시 그녀를 버티게 했지만 치유하지 못했다. 목소리와 노래는 남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절제와 처절함을 오가는 목소리가 담긴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바로 이 역설에서 비롯된다. 예술은 영속됐지만 인간은 휘발됐다. 음악은 살아남았고, 인간은 구원받지 못했다.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무너져가는 인간의 삶 앞에서 예술은 때로 무력하다. 우리는 예술을 믿고, 예술에 기대고,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은 그 믿음에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노래는 시간을 넘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재생되고, 수많은 이들의 감정을 흔들고, 여전히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 노래가 흐르던 무대 위,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남긴 음악의 영속성은 그녀의 부재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예술은 영원해졌고,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질문은 다시 남는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노래는, 누구를 위해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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