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 역사의 숨결 가득한 뉴질랜드의 수도
제주는 '섬'이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을 얘기할 때는 늘 개발과 보존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 뉴질랜드는 산악, 호수, 해안선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등 제주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김소은 THE 관광연구소 대표가 안식년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1번지'를 지향하는 제주가 참고할 만한 뉴질랜드의 사례를 가지고 독자들과 비정기적으로 만난다. [편집자 글]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비행기지만, 나는 기차를 택했다. 북섬을 남북으로 가르는 대표 열차 노던 익스플로러(Northern Explorer)는 열 시간 가까운 여정 동안 느리지만 묵직한 호흡으로 달렸다. 창밖으로는 산과 호수, 평원과 협곡, 강과 바다가 차례로 스쳐 지나가며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졌다. 초원 위에는 양떼와 소떼가 점처럼 흩어져 있었고, 때로는 토끼 떼가 풀밭을 가르며 달려갔다. 그 풍경은 다큐멘터리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했다. 오픈 객차에서는 차창을 스치는 바람을 세차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 바로 '바람의 도시' 웰링턴이다.

의회 투어: '비하이브'와 권력의 중심 속으로

또 다른 프로그램인 건축 투어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과 현대 건축이 어우러진 의사당 건물의 구조적 특징과, 내진 보강 공사로 지진에 대비한 기술적 장치까지 살펴볼 수 있다. 예술·소장품 투어에서는 곳곳에 걸린 그림과 조각, 세밀한 목재 장식과 카펫 문양을 통해 정치 공간 속에 스며든 예술적 상징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참여형 투어, 여성 의원들의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 저녁 시간대에 열리는 특별 투어까지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케이블카: 언덕과 바다를 잇는 붉은 전차
웰링턴 케이블카(Wellington Cable Car)는 1902년 처음 운행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도시의 상징적인 즐길거리다. 현재 노선은 도심의 램튼 키(Lambton Quay)에서 켈번(Kelburn) 언덕 정상까지 약 612m를 오르내리며, 빨간 전차가 천천히 오르는 풍경은 '윈디 웰리(Windy Welly)'라는 바람 많은 도시의 별명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총 고도는 120m를 상승하는 동안 터널 3개와 다리 3곳을 지나는데, 터널 내부의 LED 조명 아치는 계절과 기념일마다 다른 빛깔과 패턴으로 장식돼, 잠깐의 이동마저 작은 축제처럼 느껴지게 한다.


역사 건축물: 오래된 시간의 새로운 쓰임
도시 곳곳의 오래된 건물들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새로운 쓰임을 얻으며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옛정부관사(Old Government Buildings)다. 1876년에 세워져 한때 정부 사무실로 쓰였던 이 목조 건물은 지금은 빅토리아 대학교 웰링턴(Victoria University of Wellington) 법대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 행정의 중심지였던 건물이 오늘날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도시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웰링턴시는 이런 건축적 유산을 시민과 여행자에게 알리기 위한 트레일(Art Deco Heritage Trail)을 운영한다. 1930년대 양식의 공공건물과 상업 건물을 따라 걸으며, 그 시대의 분위기와 도시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또 건축 가이드북(Wellington Architecture: A Walking Guide)에는 도심의 120여 개 건축물이 소개되어 있어, 스스로 걸으며 건축과 도시의 이야기를 탐방할 수 있다.

예술적 감각이 살아 있는 쿠바 스트리트(Cuba Street)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거리는 건물마다건물의 예전 이름이 여전히 박혀 있어, 과거의 쓰임새를 기억하게 한다. 그 건물에 들어선 카페, 부티크 숍, 독립 갤러리들이 옛 흔적과 어우러지며,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낮에는 빈티지 숍과 출판사, 카페가 모여 여유로운 보헤미안 풍경을 만들고, 밤에는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문화의 거리로 변신한다. 거리 한복판의 버킷 분수(Cuba Street Bucket Fountain)는 장난스럽고 자유로운 도시의 기질을 보여주는 명물로 알려져 있다.
오클랜드의 중심가가 유리 빌딩으로 채워져 있다면, 웰링턴의 중심가는 의회, 법원, 옛 정부청사, 아르데코 상가들이 이어져 있어 걸음마다 역사의 질감을 만나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문화·예술 공간: 낮에는 박물관, 밤에는 무대
웰링턴의 음악 중심지는 1904년에 지어진 웰링턴 타운홀(Wellington Town Hall)이다. 이곳은 내가 머무는 동안 오클랜드 곳곳의 공연에서 만났던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NZSO)와 빅토리아 대학 음악학과의 본거지이다. 그러나 2013년 지진 안전 문제로 문을 닫고, 현재 보강 공사 중이다. 대신 바로 옆 마이클 파울러 센터(Michael Fowler Centre, 1983)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1983년에 건립된 현대식 공연장으로 웰링턴의 대표 무대를 맡고 있다. 120년 전 건축물과 현대식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 풍경은 웰링턴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내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테파파 박물관 옆에는 서카(Circa) 극장이 자리한다. 1976년 배우들이 스스로 세운 이 소극장은 지금도 뉴질랜드 창작극과 실험적인 무대를 꾸준히 올리며, 웰링턴을 예술의 도시로 만든 숨은 심장처럼 뛰고 있다. 화려한 오페라하우스나 세인트 제임스 극장이 도시의 겉모습을 장식한다면, 서카는 무대와 관객이 가장 가깝게 호흡하는 공간이다.
해가 지면 공연장들이 다시 문을 연다. 마이클 파울러 센터에서는 심포니와 오페라가, 세인트 제임스 극장(St James Theatre)에서는 뮤지컬과 발레가 무대에 오른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쉽게 예매할 수 있고, 학생이나 관광객을 위한 저렴한 티켓도 마련돼 있어 부담이 적다. 그래서 웰링턴에서는 도심을 걸으며 낮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저녁에는 공연장을 자연스럽게 하루 일정에 끼워 넣을 수 있다.

해산물과 로컬 요리: 수도에서 맛보는 바다의 식탁

또 웰링턴의 식당들은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그날그날 달라지는 '오늘의 생선(Fish of the Day)'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신선한 요리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뉴질랜드는 전역에서 해산물이 풍부하지만, 웰링턴은 수도라는 특성 덕분에 전국 각지의 요리와 로컬 푸드를 두루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그래서 "seafood game is strong(해산물이 특히 뛰어나다)"는 평가가 붙기도 한다. 굴과 연어, 스내퍼나 블루 코드 같은 생선 요리에서부터 퓨전 메뉴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매년 열리는 웰링턴 온 어 플레이트(Wellington On a Plate) 같은 미식 축제에서는 레스토랑과 카페, 푸드트럭이 참여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식탁으로 변한다.
물론, 남섬 피오르드 지역이나 해산물 어장이 발달한 말보러(Marlborough)지역이 해산물이 더 다양하고 신선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도이기에 해양 요리를 폭넓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웰링턴의 또 다른 강점으로 꼽힌다.
오래된 미래의 도시로서의 웰링턴
웰링턴을 걸으며 깨달은 건, 이 도시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래된 건축물은 여전히 쓰임을 이어가고, 의회와 광장은 시민들에게 열려 있으며, 언덕과 바다는 언제든 삶 속에 들어온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말한 오래된 미래는, "과거의 지혜와 공동체성을 지키면서도 미래를 품는 태도"다. 웰링턴은 그 말이 현실로 구현된 듯한 도시였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만난 웃음, 박물관에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소리, 시장의 해산물 냄새, 저녁 무대 위의 노래와 연주 등 이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도시의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내게 "언제든 다시 돌아와 함께 숨쉬고 싶은 도시"로 남았다. 오래된 시간을 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이곳에서, 나는 뉴질랜드가 지향하는 문화적 미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제주에서 10여년을 살다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 생태관광, 람사르습지 보전, 해양관광 자원 발굴 등과 관련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으며,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대학때부터 관광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석박사 과정에서 관광경제, 마케팅, 관광객 행동 등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 THE(Think for Human & Earth) 관광연구소 대표, 섬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