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 역사의 숨결 가득한 뉴질랜드의 수도

김소은 2025. 10. 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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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제주를 보다] ⑩ 행정의 중심지에서 보는 오래된 미래

제주는 '섬'이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을 얘기할 때는 늘 개발과 보존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 뉴질랜드는 산악, 호수, 해안선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등 제주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김소은 THE 관광연구소 대표가 안식년으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관광 1번지'를 지향하는 제주가 참고할 만한 뉴질랜드의 사례를 가지고 독자들과 비정기적으로 만난다. [편집자 글]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비행기지만, 나는 기차를 택했다. 북섬을 남북으로 가르는 대표 열차 노던 익스플로러(Northern Explorer)는 열 시간 가까운 여정 동안 느리지만 묵직한 호흡으로 달렸다. 창밖으로는 산과 호수, 평원과 협곡, 강과 바다가 차례로 스쳐 지나가며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졌다. 초원 위에는 양떼와 소떼가 점처럼 흩어져 있었고, 때로는 토끼 떼가 풀밭을 가르며 달려갔다. 그 풍경은 다큐멘터리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했다. 오픈 객차에서는 차창을 스치는 바람을 세차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 바로 '바람의 도시' 웰링턴이다.

웰링턴은 '윈디 웰리(Windy Welly)'라는 별명을 가진 도시다. 가만히 서있기 힘들게 하루에도 몇 차례 찾아오는 강한 바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거리에는 모자를 단단히 눌러쓴 사람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항만 위로 출렁이는 파도와 언덕 위로 나부끼는 나무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추듯 어우러지며, 웰링턴만의 독특한 기운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웰링턴의 첫인상은 '끊임없는 움직임과 생동감'이었다.
노던 익스플로어의 식당 칸 / 사진=김소은

의회 투어: '비하이브'와 권력의 중심 속으로

웰링턴은 뉴질랜드의 수도로 정치 중심지다. 국회의사당(Parliament)의 기능확장을 위해 신축된 비하이브(The Beehive)는 도시의 랜드마크로, 일반인도 여러 형태의 무료 투어를 통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내가 참여한 일반 투어는 약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토론이 벌어지는 회의장, 의원들이 법안을 다루는 위원회실, 장대한 홀과 도서관까지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권력이 실제로 움직이는 공간을 가까이에서 보니, 뉴질랜드의 사회문화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느낌이다.
뉴질랜드 국회 도서관을 개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 사진=김소은

또 다른 프로그램인 건축 투어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과 현대 건축이 어우러진 의사당 건물의 구조적 특징과, 내진 보강 공사로 지진에 대비한 기술적 장치까지 살펴볼 수 있다. 예술·소장품 투어에서는 곳곳에 걸린 그림과 조각, 세밀한 목재 장식과 카펫 문양을 통해 정치 공간 속에 스며든 예술적 상징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참여형 투어, 여성 의원들의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 저녁 시간대에 열리는 특별 투어까지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사당이라는 공간이 시민과 관광객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개방성과 신뢰, 그리고 정치와 건축·예술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울림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왼쪽부터 비하이브와 국회의사당, 국회도서관 / 사진=김소은

케이블카: 언덕과 바다를 잇는 붉은 전차

웰링턴 케이블카(Wellington Cable Car)는 1902년 처음 운행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도시의 상징적인 즐길거리다. 현재 노선은 도심의 램튼 키(Lambton Quay)에서 켈번(Kelburn) 언덕 정상까지 약 612m를 오르내리며, 빨간 전차가 천천히 오르는 풍경은 '윈디 웰리(Windy Welly)'라는 바람 많은 도시의 별명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총 고도는 120m를 상승하는 동안 터널 3개와 다리 3곳을 지나는데, 터널 내부의 LED 조명 아치는 계절과 기념일마다 다른 빛깔과 패턴으로 장식돼, 잠깐의 이동마저 작은 축제처럼 느껴지게 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곧바로 케이블카 박물관(Cable Car Museum)이 반긴다. 원래 케이블카를 움직이던 와인딩 하우스 건물이던 이곳은 지금은 당시의 구동 장치와 초기 차량 모델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구동 원리를 보여주는 기계실과 함께 소규모 행사와 상영을 위한 극장·갤러리 공간까지 운영돼 있어, 단순한 전시를 넘어 케이블카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케이블카 박물관 / 사진=김소은
언덕 위에서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린다. 켈번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웰링턴 항만의 전경은 도시의 매력을 한눈에 보여주고, 보태니컬 가든(Botanic Garden)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사계절 내내 다른 빛깔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더 나아가 무료 셔틀을 타면 질랜디아(Zealandia) 조류보호구역을 갈 수 있는데, 멸종 위기종을 포함한 뉴질랜드 고유 생태계를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켈번(Kelburn) 정상에서 보이는 웰링턴 항만(Wellington Harbour) / 사진=김소은

역사 건축물: 오래된 시간의 새로운 쓰임

도시 곳곳의 오래된 건물들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새로운 쓰임을 얻으며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옛정부관사(Old Government Buildings)다. 1876년에 세워져 한때 정부 사무실로 쓰였던 이 목조 건물은 지금은 빅토리아 대학교 웰링턴(Victoria University of Wellington) 법대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 행정의 중심지였던 건물이 오늘날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도시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뉴질랜드 대법원은 2010년 신축된 원형 대법원동(카우리 열매 모티프)과, 1879~81년 건립된 구 고등법원이 유리 아트리움으로 연결된 복합 건물이다. 신축된 건물은 카우리 나무 열매에서 영감을 받은 원형 건물로, 내부에는 뉴질랜드 토종 목재가 가득하다. 유리 아트리움으로 옛 고등법원(1879)과 이어진 이 공간은 법과 정의가 과거의 토대 위에 서서 미래를 품는다는 건축적 상징을 구현하고 있다.
뉴질랜드 고유종 나무 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대법원 / 사진=김소은

웰링턴시는 이런 건축적 유산을 시민과 여행자에게 알리기 위한 트레일(Art Deco Heritage Trail)을 운영한다. 1930년대 양식의 공공건물과 상업 건물을 따라 걸으며, 그 시대의 분위기와 도시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또 건축 가이드북(Wellington Architecture: A Walking Guide)에는 도심의 120여 개 건축물이 소개되어 있어, 스스로 걸으며 건축과 도시의 이야기를 탐방할 수 있다.

도심 한복판의 웰링턴 역(Wellington Railway Station, 1937)은 클래식한 석조 건축으로, 지금도 매일 수많은 통근객이 드나드는 도시의 관문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뉴질랜드 대법원(Supreme Court of New Zealand)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과 현대적 확장이 조화를 이룬 건물로, 법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품고 있다. 금융가에 자리한 올드 뱅크 아케이드(Old Bank Arcade)는 1901년 완공된 은행 건물이 지금은 쇼핑 아케이드로 변신해, 고풍스러운 외관 속에서 현대적 상점과 카페가 성업 중이다.
1901년에 은행으로 쓰이던 곳이 쇼핑몰로 기능중이다. / 사진=김소은

예술적 감각이 살아 있는 쿠바 스트리트(Cuba Street)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거리는 건물마다건물의 예전 이름이 여전히 박혀 있어, 과거의 쓰임새를 기억하게 한다. 그 건물에 들어선 카페, 부티크 숍, 독립 갤러리들이 옛 흔적과 어우러지며,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낮에는 빈티지 숍과 출판사, 카페가 모여 여유로운 보헤미안 풍경을 만들고, 밤에는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문화의 거리로 변신한다. 거리 한복판의 버킷 분수(Cuba Street Bucket Fountain)는 장난스럽고 자유로운 도시의 기질을 보여주는 명물로 알려져 있다. 

오클랜드의 중심가가 유리 빌딩으로 채워져 있다면, 웰링턴의 중심가는 의회, 법원, 옛 정부청사, 아르데코 상가들이 이어져 있어 걸음마다 역사의 질감을 만나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문화·예술 공간: 낮에는 박물관, 밤에는 무대

웰링턴의 음악 중심지는 1904년에 지어진 웰링턴 타운홀(Wellington Town Hall)이다. 이곳은 내가 머무는 동안 오클랜드 곳곳의 공연에서 만났던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NZSO)와 빅토리아 대학 음악학과의 본거지이다. 그러나 2013년 지진 안전 문제로 문을 닫고, 현재 보강 공사 중이다. 대신 바로 옆 마이클 파울러 센터(Michael Fowler Centre, 1983)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1983년에 건립된 현대식 공연장으로 웰링턴의 대표 무대를 맡고 있다. 120년 전 건축물과 현대식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 풍경은 웰링턴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내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외의 문화시설도 관광객에게 활짝 열려 있다. 국제행사가 열리는 타키나 컨벤션 센터(Tākina Wellington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re)는 누구나 건축 공간을 둘러보고, 로비에 전시된 작품과 기획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시티 갤러리 웰링턴(City Gallery Wellington)은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무료 전시장으로, 바로 앞 광장에서는 소규모 퍼포먼스와 마켓이 자주 열려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항구에 자리한 웰링턴 박물관(Wellington Museum)은 도시의 해양사와 일상사를 담은 공간으로, 옛 항만 창고(1892년) 건물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국립박물관 '뮤지엄 오브 뉴질랜드 테 파파 통가레와(Museum of New Zealand Te Papa Tongarewa, 줄여서 Te Papa)보다 규모는 작지만 가볍게 둘러보기 좋다.
웰링턴 박물관 / 사진=김소은

테파파 박물관 옆에는 서카(Circa) 극장이 자리한다. 1976년 배우들이 스스로 세운 이 소극장은 지금도 뉴질랜드 창작극과 실험적인 무대를 꾸준히 올리며, 웰링턴을 예술의 도시로 만든 숨은 심장처럼 뛰고 있다. 화려한 오페라하우스나 세인트 제임스 극장이 도시의 겉모습을 장식한다면, 서카는 무대와 관객이 가장 가깝게 호흡하는 공간이다.

해가 지면 공연장들이 다시 문을 연다. 마이클 파울러 센터에서는 심포니와 오페라가, 세인트 제임스 극장(St James Theatre)에서는 뮤지컬과 발레가 무대에 오른다. 대부분 온라인으로 쉽게 예매할 수 있고, 학생이나 관광객을 위한 저렴한 티켓도 마련돼 있어 부담이 적다. 그래서 웰링턴에서는 도심을 걸으며 낮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저녁에는 공연장을 자연스럽게 하루 일정에 끼워 넣을 수 있다.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4% 수준이 사는, 작은 수도지만 그 안에 응축된 문화적 접근성과 예술적 밀도는 오히려 컸다. 도심 대부분의 문화시설이 도보 거리 내에 밀집해 있어, 하루에 여러 공간을 오가며 예술과 일상을 자연스럽게 엮어낼 수 있었다.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 감각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예술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듯 했다.
테파파 뮤지엄 실내에서 바라보는 웰링턴 도심의 모습 / 사진=김소은

해산물과 로컬 요리: 수도에서 맛보는 바다의 식탁

웰링턴에서는 뉴질랜드 특유의 해산물 요리인 화이트베이트 프리터(Whitebait Fritter)를 맛볼 수 있다. 화이트베이트는 서해안 강과 하구에서 잡히는 실치보다는 조금 두ᄁᅠᆸ고 긴 물고기인데, 제철에만 잡히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계절 음식'으로 불린다. 원주민 마오리들이 일찍부터 강가에서 그물과 바구니로 잡아 먹었던 전통에서 시작해, 19세기 유럽 이주민들에 의해 튀김·전 형태로 발전했다. 지금은 빵 사이에 넣어 간단히 먹거나 레몬즙을 뿌려 즐기는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맛"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고, 한 철만 즐길 수 있는 고급음식이자, 여행자에게는 뉴질랜드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맛이다.
한국의 실치와 비슷한 화이트베이트 프리터 / 사진=김소은

또 웰링턴의 식당들은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그날그날 달라지는 '오늘의 생선(Fish of the Day)'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신선한 요리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뉴질랜드는 전역에서 해산물이 풍부하지만, 웰링턴은 수도라는 특성 덕분에 전국 각지의 요리와 로컬 푸드를 두루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그래서 "seafood game is strong(해산물이 특히 뛰어나다)"는 평가가 붙기도 한다. 굴과 연어, 스내퍼나 블루 코드 같은 생선 요리에서부터 퓨전 메뉴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매년 열리는 웰링턴 온 어 플레이트(Wellington On a Plate) 같은 미식 축제에서는 레스토랑과 카페, 푸드트럭이 참여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식탁으로 변한다. 

물론, 남섬 피오르드 지역이나 해산물 어장이 발달한 말보러(Marlborough)지역이 해산물이 더 다양하고 신선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도이기에 해양 요리를 폭넓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웰링턴의 또 다른 강점으로 꼽힌다.

오래된 미래의 도시로서의 웰링턴

웰링턴을 걸으며 깨달은 건, 이 도시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래된 건축물은 여전히 쓰임을 이어가고, 의회와 광장은 시민들에게 열려 있으며, 언덕과 바다는 언제든 삶 속에 들어온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말한 오래된 미래는, "과거의 지혜와 공동체성을 지키면서도 미래를 품는 태도"다. 웰링턴은 그 말이 현실로 구현된 듯한 도시였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만난 웃음, 박물관에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소리, 시장의 해산물 냄새, 저녁 무대 위의 노래와 연주 등 이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도시의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내게 "언제든 다시 돌아와 함께 숨쉬고 싶은 도시"로 남았다. 오래된 시간을 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이곳에서, 나는 뉴질랜드가 지향하는 문화적 미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김소은

제주에서 10여년을 살다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 생태관광, 람사르습지 보전, 해양관광 자원 발굴 등과 관련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으며,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대학때부터 관광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석박사 과정에서 관광경제, 마케팅, 관광객 행동 등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 THE(Think for Human & Earth) 관광연구소 대표, 섬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