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식 칼럼] 한국과 중국, 통일 강박관념 내려놓고 실용적 해법 모색해야

10월 14일 8개월 만에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갔다. 출국 전에 국내에선 올해 대만 국내총생산(GDP) 성장이 약 5% 예상되고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언론을 통해 크게 다뤄졌다. 그 비결은 TSMC를 비롯한 반도체 수출의 호황에 있었다. 그렇다면 대만 현지 분위기는 어떨까? 타이베이에서 만난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도체와 과학기술분야에선 호황이지만,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의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 교수나 연구소 연구위원의 급여도 10년째 월 400만원 수준으로 제자리걸음이라고 했다.
동행한 대만 전문가인 장영희 충남대 교수 겸 평화네트워크 운영위원은 대만 학자를 만나기 전에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선 우리가 밥값을 내야 할 거예요”라고 말했었다.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만 학자의 얘기를 듣고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대만 학자들도 대만 사람들의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요즘 민생과 국방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총과 버터’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는 인류 사회의 오랜 고민거리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 일본, 대만, 유럽 등 미국의 동맹들이 비슷한 처지에 몰리고 있다. 미국의 안보 공약은 믿기 어려워지고 미국이 노골적으로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면서 전례 없는 군비증강에 나서고 있다. 그럴수록 민생의 주름살은 더 깊어진다. 방위비도 늘어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무기로 삼아 터무니없는 대미 투자 압박을 가해오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실제로 거론되고 있는 미국의 주요 동맹들의 대미 투자 액수는 천문학적이다. 한국 3500억 달러, 일본 5500억 달러, 유럽연합(EU) 6000억 달러 등만 합쳐도 1조5000억 달러에 달한다. 대만 TSMC는 1천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고 영국도 미국과 2000억 달러 규모의 상호 투자를 논의하고 있다. 석유 부국들이자 미국의 중동 동맹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도 대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거나 논의 중에 있다. 이들 규모를 모두 합치면 3조 달러 안팎에 달한다. 올해 미국 국내총생산이 30조 달러 정도로 예측되는데, 그 10분의 1 수준을 동맹을 압박해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들에게 ‘GDP 대비 5% 방위비’를 가이드라인처럼 제시하고 있다. 6월 하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선 현재 GDP 대비 2.2% 수준인 방위비를 매년 대폭 늘려 2035년까지 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한국과 일본은 이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방위비 대폭 증액에 이미 착수했거나 그럴 계획을 밝히고 있다. 대만의 라이칭더 총통도 내년도 방위비를 GDP 대비 2.5%에서 3% 이상으로, 2030년까진 5%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자주국방 역량을 구축하겠다고도 한다. 자주국방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또다시 한국에서 주요 화두로 등장한 상황이다.
15일 오전에는 학술회의 참석차 타이베이에서 진먼도로 향했다. 양안 전쟁과 교류협력의 최전선인 진먼도 방문은 두 번째인데, 6월에는 중국 샤먼에서 배를 타고 30분 만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타이베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한반도와 양안 문제를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주목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양 지역 모두 오랜 기간 ‘분단국가이고 그래서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정체성을 공유했었다. 하지만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이러한 정체성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은 2023년부터 남북관계를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로 규정하곤 통일을 지우고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국가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통일지향적인 특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화해온 대만은 최근 민주진보당이 세 차례 연속 집권하면서 ‘주권을 보유한 독립 국가’를 향한 노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중국은 대만을 “하나의 성”으로 간주하면서 대만 통일 의지를 더더욱 다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조선노동당과 대만 민진당은 ‘통일이 싫으니 따로 살자’며 같은 목소리를 낸다. 한국과 중국은 이구동성으로 ‘두 국가론을 받아들일 수 없고 통일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양안 통일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두둔하는 나라가 조선이다. 한국은 양안 분쟁 발생시 이에 연루될 가능성을 경계하면서도 중국이 대만을 통일할 경우 아시아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상(status quo)’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흔히 국제사회에선 조선과 중국을 수정주의, 즉 강압과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조선은 ‘두 국가론’에 입각한 현상 굳히기에 들어갔다. 양안 관계는 어떨까? 흔히 중국이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시도한다며, 이에 대한 견제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해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국가들 대부분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이는 대만이 중국과 별개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립을 추구할수록 대만이 현상변경을 시도한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하여 동아시아의 양대 갈등 지역인 한반도와 양안에선 통일과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대안적 논의가 절실해지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두 지역의 위기 구조가 고도로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한국과 중국 모두 통일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자 약 160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고 별개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있는 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건 쉽지 않다. ‘조선 국가 인정=통일 포기’라는 단선적 인식을 극복하고 상호 국가 인정과 평화공존부터 이뤄내면서 통일은 미래 세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다. 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론’이 관계의 산물인 만큼, 관계의 재설정과 발전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중국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의 입장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들도 동의한 바이다. 이에 따라 중국이 “중국의 일부”라는 대만을, 그것도 평화적 방법이 사라지면 무력을 써서라도 통일하겠다는 태도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대만의 분리·독립을 반대·저지하겠다는 입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은 자신의 통일 모델인 ‘일국양제’가 통일 후의 제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만을 ‘하나의 중국’ 내에 존재하는 정치체로 인정하면서 양안 평화를 정착하고 교류협력과 통합의 과정을 하나둘씩 밟아가는 것이 중국을 포함한 모두에게 이로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민생과 국방의 관계로 돌아와 보자. 때마침 국립진먼대학교에서 열린 학술회의 대주제는 ‘왕도 문화와 양안 평화’였다. 민심과 민생을 중시하는 왕도주의 사상이 양안 관계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자는 취지였다. 나는 민생과 군비를 화두로 꺼냈다. 둘 사이의 딜레마가 커질수록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국내에선 조선인민군은 128만에 달하는 반면에 한국은 병역자원의 급감으로 병력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자 이재명 대통령은 9월 21일에 페이스북에 “AI 전투로봇, 자율드론, 초정밀 공격 방어 미사일 체계를 구비한 50명이면 100명 아니라 수천 수만의 적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며 “대한민국 군대는 징병 병력수에 의존하는 인해전술식 과거형 군대가 아니라, 유무인 복합체계로 무장한 유능하고 전문화된 스마트 정예 강군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10월 20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에선 대폭적인 국방비 증액과 방위산업 육성을 통해 자주국방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질문과 고민이 빠져 있다. 우선 조선인민군이 128만이라는 추정이 맞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미 일부 연구자들은 국방부의 추산이 과도하다고 지적해왔다. 인구 규모,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 아사와 영양실조, 노동집약적 산업화, 저출산과 청년 인구 감소, 군 복무 기간 단축 등 조선의 최근 상황을 종합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수치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128만을 기준으로 삼아 대책을 세운다. 또 우리에게 50만의 병력이나 유인 병력을 대체할 무인 무기체계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유사시 ‘점령→안정화→통일’로 이어지는 군사 계획을 내려놓으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기에 제기하는 문제이다.
민생과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민은 더욱 절실하다. 이 대통령은 국방비를 대폭 늘리겠다고 하고 국방부는 국방비를 매년 8%씩 증액할 계획이라고 한다. 8% 인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재명 대통령 임기 5년간 국방비 총액은 약 393조원에 달하게 된다. 이는 향후 5년간 국방비를 올해 국방비인 62조원으로 동결하면 83조원의 예산 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를 민생에 투입하면 만만치 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가령 83조원을 민생지원금으로 전환하면 매년 5천만 명에게 33만원씩 지급할 수 있다. 국방은 어떻게 하냐고? 국방비를 동결해도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 건설도 가능해진다. 군비증강과 직결된 방위력개선비를 매년 17조원 정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천문학적인 국방비 증액이 민생에 커다란 기회비용을 초래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대안을 고민하게 된다. 우리에겐 남북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일단 대규모 군비증강과 남북관계 발전은 어울리는 짝이 아니다. 오히려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한국의 대규모 전력증강을 한축으로 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예고한 ‘국방 분야에서의 핵무력과 상용무력 병진노선’을 다른 축으로 하는 극심한 군비경쟁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평화가 경제다”를 핵심적인 국정기조로 삼고 있는 이재명 정부로선 심사숙고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럼 평화-민생-자주국방의 선순환을 도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한반도 평화협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 통해 증진된 평화는 ‘평화배당금’ 창출로 민생에 기여하고, 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한 근원의 해소, 즉 한국전쟁과 적대관계의 종식으로 전작권 환수 조건이 자연스럽게 충족될 수 있다. 세계 여러 분쟁의 종식을 최대 업적으로 삼으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 법한 사안이다. 역사성-현실성-미래지향성을 두루 고려할 때, 우리에게 ‘신의 한 수’는 바로 평화협정이다. 정부도 이 대업에 선택과 집중을 하길 바란다.
정욱식 한겨례평화연구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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