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이라고, 그는 거칠게 믿었다. 값비싼 음식도, 빛나는 보석도, 사랑하는 마음 앞에선 부질없는 것이라 여겼다. 치기 어린 철부지의 분별 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냉정한 표정이었다. 같은 인간으로, 같은 인종으로 보지 않는 눈빛. 젊은 사내는 파충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중후한 중년의 남자는 조용히 읊조렸다. “가난한 남자는 부잣집 여자와 결혼을 생각해선 안 되는 법이지.”
“난 왜 당신을 가질 수 없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출처=워너브러더스코리아]
죽음을 결심했다. 삶의 기둥이던 사랑이 무너진 탓이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어서, 삶과 죽음은 구별되지 않았다. 죽음이 일상이고, 삶이 비정상인 곳으로 향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전장터였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는 소설을 썼다.
미친 듯이 돈을 벌어, 돈 없는 사람과 살 수 없다며 떠나버린 첫사랑의 불륜남으로 다시 서고자 했던 남자의 이야기. ‘위대한 개츠비’의 토대가 되는 작품이었다. 소설은 상상의 세계에서 피어난 꽃일 테지만, 그 비료가 되는 건 삶의 엉킨 실타래였다.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실연과 응분과 분노가 이야기에 고스란했다.
“가난은 지독히도 날 옭아매었지.” 1921년의 스콧 피츠제럴드.
글재주로 충만한 피츠제럴드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미국 미네소타의 사업가였는데, 수완이 좋지 않았다. 자기 사업을 관두고 일자리를 구했다. 일에도 영 소질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금방 잘려버렸다. 아내 메리의 친정 재산으로 먹고 사는 허랑방탕한 인물이 에드워드였다.
이런 집의 자식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뉘기 마련인데, 하나는 아버지를 꼭 빼닮아 작은 난봉꾼이 되거나, 또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타산지석 삼아 옳고 바른 길을 걷거나였다. 다행히도 스콧 피츠제럴드는 후자에 가까워서 책과 문학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나이 13살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할 정도였다. 어머니 메리는 시름을 내려놨다.
“엄마, 저는 아빠처럼 안 살래요.” 어린 시절 스콧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 가문은 아일랜드에서 이민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스콧 피츠제럴드는 미국에서 명망 있는 가톨릭 학교에서 수학했다. 글쓰기 재능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튀어나온 것이어서, 교사들은 “피츠제럴드는 작가가 돼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선생님들의 인정과, 그의 날카로운 글솜씨는 그를 명문 프린스턴 대학으로 끌었다. 피츠제럴드는 작가로 먹고살기를 꿈꿨다.
1916년 2학년으로 올라가던 그해, 크리스마스는 추웠고, 추운 만큼 눈이 부셨다. 날씨도 날씨였겠지만, 파티장에서 본 여인 지네브라 킹이 뿜어내는 빛때문이었다. 하얀 피부만큼이나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지네브라 킹에게 피츠제럴드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피츠제럴드는 눈빛으로써 마음을 전했고, 글로써 한발짝 다가갔다. 열여섯의 지네브라 킹은 무른 마음의 소녀여서, 미문(美文)으로 다가오는 그의 방식이 좋았다.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적었다.
“스콧, 당신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지? 또 왜 이렇게 매력이 있는 거지?” 지네브라 킹.
초기의 사랑은 뜨거운 온도만큼이나 팽창력이 컸다. 지네브라 킹은 열애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저명하고 부유한 주식 중개인인 아버지 찰스 가필드는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배금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 가난한 스콧 피츠제럴드는 뜨내기, 인간 말종, 혹은 그 이하의 존재였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지네브라 킹의 사랑은 조각난 정도를 넘어 바스러졌다. 찰스 가필드가 피츠제럴드의 가난을 모욕해서였다.
전장에 몸을 던지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제1차 세계대전 입대를 결정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서였다. 빗발치는 총탄의 한가운데 몸을 던져 사랑의 고통을 잊고자 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는 소설인지, 유언장인지 모호한 글 12만자를 썼다. ‘더 로맨틱 에고이스트’였다. 피츠제럴드는 이 유언장이 자신의 죽음과 맞물려 지네브라 킹에게 닿길 바랐다. 그의 아버지가 천재 작가의 글솜씨를 뒤늦게 알아보고 후회하길 바랐다.
전쟁은 미국이 속한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고,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은 소설로 남았다. 찰스 가필드에겐 닿지 않았지만 출판쟁이들이 ‘피츠제럴드’의 이름을 새겼다.
“군인이 되면, 상처가 좀 아물겠지.” 스콧 피츠제럴드.
이별의 상처는 세월에 아물기 마련이어서, 손으로 거칠게 문질러도 아무렇지 않은 순간이 왔다.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로 돌아온 ‘군인’ 피츠제럴드는 새로운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곤 했다. 가벼운 마음이었고, 사무치는 그리움도 아스라했다. ‘젤다’를 만난 건 그때였다.
그녀는 내로라하는 판사의 딸이었는데, 그만큼 부유했고, 그만큼 거들먹거리는 집안이었다. 피츠제럴드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지네브라 킹이 떠올라서였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데이트 하면서도, 동시에 지네브라 킹이 떠올라, 그녀에게 다시 편지 보냈다. 재회의 가능성을 묻는 처연한 서신이었다. “미안해요, 저 곧 결혼해요.” 답장은 길지 않았지만, 피츠제럴드의 상처를 다시 찢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젤다, 당신도 날 떠날거야?” 피츠제럴드와 젤다.
피츠제럴드는 ‘치료’가 필요했고, ‘젤다’는 반창고로 충분해 보였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에게 공식적으로 청혼했다. 지네브라 킹의 결혼식 3일 뒤였다. 젤다는 지네브라 킹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여인이어서, 피츠제럴드를 제법 진지한 연애관계로 여겼다. 단, 결혼을 위한 조건을 붙였다. “작가로서, 충분히 성공할 것.”
미친 듯이 글을 쓰다
피츠제럴드는 절박했다. 젤다마저 잃는다면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네브라 킹으로부터 얻은 상처까지 다시 덧날 것이었다. 피츠제럴드는 펜을 꽉 쥐었다. 예술가의 창조혼보다는, 생활인의 곤궁함이 동력이었다. 낮에는 광고 카피를 쓰고, 밤에는 단편 소설을 휘갈겼다. 뭐라도 터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젤다의 어엿한 남편감이 되기 위해서였다.
“넘치는 흥을 재즈로 즐겨야죠.” 재즈시대에 흥을 즐기는 1920년대 미국 젊은이들.
글쓰기는 바다 수영과 같은 것이어서, 잔뜩 힘이 들어갈수록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걸 피츠제럴드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쓴 광고 카피는 주목을 받았지만 성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단편 소설은 언제나 퇴짜 맞았다. 그의 글이 120번이나 거절 당했을 때, 그는 젤다에게 파혼당했다.
당시 뉴욕은 ‘재즈시대’를 맞아 번영하며 빛났지만, 그늘을 피츠제럴드에게 드리웠다. 넘쳐나는 돈으로 모든 미국인이 ‘재즈’를 추며 아드레날린을 뿜어댔지만, 피츠제럴드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악운이 자기에게 몰려오고 있으며, 이제 진실로 삶을 마칠 때라고 생각했다.
“난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걸까.” 책 읽는 피츠제럴드.
죽음을 각오하고 글을 쓰다
피츠제럴드의 안 주머니엔 언제나 ‘리볼버’(권총)가 있었다. 삶의 연민과 미련이 마지막 줄기로 남아 피츠제럴드를 잡았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도라 생각하고, 1919년 여름 고향인 미네소타 세인트폴로 돌아갔다. 술과 파티를 끊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썼던 ‘더 로맨틱 에고이스트’를 다시 꺼냈다.
사랑하는 이를 잡지 못한 가난한 청년의 비애와 애수로 글치레(글을 매만짐)했다. 서사가 풍부해지고, 어휘가 다양해졌다. 감성은 심해처럼 깊어졌다. 지네브라 킹과의 실연 이후 젤다에게 버림받은 고통이 피츠제럴드라는 펜의 잉크색을 진하게 했다. ‘더 로맨틱 에고이스트’는 ‘디스 사이드 오브 패러다이스’(낙원의 이편)으로 다시 쓰였다.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작가로서 피츠제럴드를 이끈 ‘낙원의 이편’.
1920년 3월, ‘낙원의 이편’은 순식간에 5만부가 팔렸다. “그 해 최고의 미국 소설”이라는 극찬이 따라붙었다. 문학적 센세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3살의 청년이 쓴 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섬세하게, 또 처연하게 묘사됐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출간되고, 모두가 피츠제럴드의 이름을 알게 됐을 때, 젤다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젤다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견딜 수 없어.”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젤다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가난해서 가련했던 곤궁한 시절의 보상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콧,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삶이야.” 피츠제럴드와 젤다.
재즈시대를 열렬히 즐기다
“기적의 시대였고, 예술의 시대였으며, 과잉의 시대였고, 풍자의 시대였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 ‘재즈 시대의 메아리’ 中)
피츠제럴드는 ‘재즈 시대’를 열렬히 즐겼다. 평생을 발목 잡아 온 가난을 떨쳤다는 해방감에서였다. 그는 아내 젤다와 함께 뉴욕 호텔을 전전하면서 본인들의 자유분방함을 뽐냈다. 호텔 회전문에서 30분을 돌기도 했다. 그들의 기이한 행동은 그들의 명성을 퍼뜨리는 자양분이 됐고, 뉴욕의 이름있는 인사들이라면 모두가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나고 싶어했다.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 작품에서 술에 절은 여인을 묘사한 젤다 피츠제럴드의 작품.
부부에게서는 늘 술냄새가 풍겼고, 그들의 호기로운 말들에 손님들은 박장대소했다. ‘금주법’으로 술이 금지됐지만,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몰래 모여 술파티를 즐겼다. 취한만큼 도덕심이 술에 절여졌고, 두 사람은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한눈 팔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술 마시고, 춤을 추며 성적으로 자유로운 신(新) 여성인 ‘플래퍼’들에 피츠제럴드는 눈을 자주 빼앗겼다. 부부는 서로의 불륜을 비난하며 삿대질하면서도 서로의 곁을 떠나진 않았다.
“우리 여자들은 이제부터 자유로운 존재야.” 1920년대 자유로운 여성인 플래퍼를 묘사한 잡지.
프랑스에서 찾아 온 파국
피츠제럴드 부부는 뉴욕의 뜨거움을 피해 프랑스 리비에라로 거처를 옮겼다. 부부 관계를 보다 회복하고,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재즈 시대’의 운율과 쾌락이 그대로 담겨 있으면서도, 그 끝에 오는 허망과 도덕적 공백을 다룬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여기서 나왔다.
사랑을 얻기 위해 부와 지위를 쌓는다는 점에서 ‘낙원의 이쪽’과 통하지만, ‘재즈 시대’의 단발성 쾌락이 주는 허무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작품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재즈시대’에 몸을 맡기면서도, 그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느꼈다. 어린 시절 그토록 원했던 ‘부와 명예’였지만, 결국 남은 건 술에 취한 채 고성을 지르는 추한 모습과 방탕함에 빠진 아내 뿐이었으니. 불륜과 오해, 살인으로 치닫는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 시대’를 허망히 바라보는 피츠제럴드의 시선이 담겨 있는 셈.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출처=워너브러더스코리아]
소설의 파멸성만큼이나, 피츠제럴드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아내 젤다가 프랑스 조종사 에두아르 조잔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피츠제럴드는 젤다를 집에 가두고, 조잔을 불렀지만, 그는 그대로 달음질쳤다. 조잔은 젤다를 하룻밤 상대 이상으로 여기지 않아서였다. 인생이 최악으로 치닫던 1925년 4월.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됐다. 평론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기대에 못미쳤다. 젤다는 “남편은 성기가 작고, 동성애자”라며 험담하고 다녔다.
유럽으로 이주한 피츠제럴드와 젤다, 그리고 딸 스코티.
무너진 젤다
젤다는 더 이상 피츠제럴드가 간절히 원하던 보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관계는 호전되지 않아서, 피츠제럴드는 10대 여배우와 바람을 폈다. 피츠제럴드의 문학을 십분 이해하는 상대였어서, 그는 지적으로도 성적으로도 만족했다.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고, 딸을 차에 태우고 절벽으로 몰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청년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글을 썼지만, 중년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 글을 써야했다. 적지 않은 치료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피츠제럴드, 제가 당신을 랑해도 되나요.” 배우 로이스 모란.
‘재즈 시대’의 축음기 전원을 끈 건 ‘대공황’이었다. 1929년부터 들이닥친 불황을 피츠제럴드도 피할 수 없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끊어버리는 건 언제나 예술이었으니까. 젤다와의 고통스런 경험을 ‘밤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Night)라는 작품으로 출간했지만, 책의 판매량은 미미했다. 피츠제럴드의 ‘재즈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춤을 췄던 신여성 플래퍼들도 실업자가 되거나,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다.
젤다가 그린 그림. 그녀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소설로 산 남자 피츠제럴드
1938년, 10월 그가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첫사랑 지네브라 킹이 피츠제럴드가 있는 할리우드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피츠제럴드를 아프게 해서, 그를 지금의 그로 있게 해준 존재와의 재회. 그 만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였을까. 피츠제럴드는 술을 마시고, 그녀를 만났다.
지네브라 킹과의 만남을 앞둔 중년의 피츠제럴드.
지네브라 킹은 “소설 속 어떤 인물이 나로부터 비롯된 거야”라고 물었다. 피츠제럴드는 말했다. “어떤 썅년일 거라 생각해?” 순백의 기억으로 남겨뒀던 첫사랑의 기억도 그렇게 오염돼 버렸다.
피츠제럴드를 지탱하던 사랑의 기억이 무너졌을 때, 그의 삶도 끝나버렸다. 1940년, 그가 알콜 중독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산해버린 술주정뱅이 소설가의 빈소는 썰렁했다. 그의 친구 도로시 파커가 관을 보며 말했다. “불쌍한 개자식.”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장례식 대사였다. 삶을 소설로 옮기다가, 소설이 삶으로 불 붙어버린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미국 메릴랜드주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 안장된 피츠제럴드 부부의 묘.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과 함께다.
‘위대한 개츠비’.
<네줄요약>
ㅇ스콧 피츠제럴드는 젊은 시절 부잣집 여식과 사랑에 빠졌지만, 모욕적인 말을 듣고 헤어져야 했다.
ㅇ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글을 쓰면서 성공하는 삶을 꿈꿨다.
ㅇ이후 만난 젤다와 만나면서 작가로서도 성공했는데, 방탕한 삶을 살아가며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다.
ㅇ아픈 사랑이 켜켜이 쌓여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의 비료가 됐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격주 주말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