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멜로디, 세대를 연결하다
2025. 10. 2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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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뮤직 SCENE] 8090 음악의 회귀
요즘 8090 대중음악 재조명 바람이 거세다. 11일 첫 전파를 탄 tvN 드라마 ‘태풍상사’ 는 1회 도입부부터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 (1993)를 ‘때리고’ 시작한다. 클론의 ‘난’ ,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도 흐른다. 지난 4일 막 내린 MBC TV ‘놀면 뭐하니’ 특별판은 두 달여간을 아예 ‘80s MBC 서울가요제’ 로 꾸몄다. 최근 TV와 숏폼을 달군 SBS ‘우리들의 발라드’ 는 평균 나이 18세(2000년대생)의 참가자들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1986)이나 강수지의 ‘흩어진 나날들’ (1991)을 천연덕스레, 때론 토로하듯 불러낸 게 포인트였다. 이런 현상, 매스미디어가 만든 환상에 불과할까.
![추석 연휴 KBS 광복 80주년 기획 콘서트에서 건재를 과시한 가왕 조용필. [사진 KBS]](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48471xlzf.jpg)
![조용필 특집에 열광한 네살배기 꼬마 C양의 메모.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49780nkse.jpg)
![최근 컴백 앨범을 내고 11월 콘서트 예정인 신승훈. [사진 도로시컴퍼니]](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1220uvnd.jpg)
![화제의 예능 ‘우리들의 발라드’. [사진 SBS]](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2554fuer.jpg)
![최근 두 달여간 방송된 ‘80s MBC 서울가요제’. [사진 MB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3859gzhl.jpg)
![인기리에 방영중인 tvN 드라마 ‘태풍상사’. [사진 tvN]](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5300vifr.jpg)
![21일 재결합 내한 공연을 연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사진 라이브네이션코리아]](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6612pbjx.jpg)
![90년대 S.E.S.를 연상시키는 신인 걸그룹 하츠투하츠. [뉴시스]](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7983itfy.jpg)
![라디오헤드의 명반 ‘OK Computer’.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5/joongangsunday/20251025011959287cnbj.jpg)


…. 제 인생까지 반성, 반추하게 됐지 뭐예요. 흑흑.” (최근 만난 음악 기획자 A씨. 1983년생)
‘조용필 티비’ ‘보고 싶다’(얼마 전 만난 방송인 B씨의 휴대전화 케이스에 암호처럼 삐뚤빼뚤 글씨를 남겨둔 2021년생 C양. 추석에 가족들과 다 함께 조용필 콘서트를 봤는데 꼬맹이가 너무 좋았는지 직접 써서 엄마한테 건넸다고.)
지난 6일 방송된 KBS 광복 80주년 기획 콘서트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의 여운이 길다. 전국 평균 시청률 15.7%(닐슨코리아 기준), 분당 최고 시청률 18.2%.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1980~90년대 히트곡이었다. ‘단발머리’(1980), ‘고추잠자리’(1981)를 필두로 ‘허공’ ‘모나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여행을 떠나요’를 지나 ‘꿈’(1991), ‘슬픈 베아트리체’(1992)까지 수많은 명곡이 스쳐 갔다.
숏폼과 OTT로 분절됐던 가가호호에 경계를 넘어 8090 감성이 밀어닥쳤다. ‘고추잠자리’는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실려서도 화제다. 이 영화엔 산울림 김창완의 1983년 솔로 작품 ‘그래 걷자’도 들어갔다. 마침 신승훈·김건모·코요태 등도 오랜만에 컴백했다. 요즘 중고생들을 만나 알고리즘이나 플리(플레이리스트) 이야기를 꺼내면 ‘조용필 아저씨 노래에 꽂혔다’ ‘김건모 노래, 신박하고 좋다’는 반응이 심심찮게 돌아온다.
광복 80주년 조용필 콘서트 시청률 18%
이 현상을 라면에 비유해 보고 싶다. 1983년 9월 13일 출시된 안성탕면 ‘초판’은 지금 맛볼 수 없다. 라면 박물관에 가면 봉지나 디자인은 볼 수 있겠지만. 유통기한 42년짜리 라면은 없다. 하지만 1985년에 나온 들국화 1집의 ‘행진’이나 1963년 발매된 비틀스 1집의 ‘Love Me Do’는 어떤가. 당일 서울스튜디오나 EMI 스튜디오(런던)에서 갓 구워 나온 그 상태 그대로, 내 휴대전화 속 앱에서 2025년에 따끈따끈 똑같이 즐길 수 있다. 20세기 음악은 음원 서비스의 시대를 만나 2025년 10월 현재에도 신선식품이다.
그러니까 20세기의 대기를 마셔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8090 음악은 마치 막 뜯어 지금 끓여 먹을 수 있는 안성탕면 초판 같은 거다. 불닭볶음면, 마라탕에 물려갈 때쯤 손에 쥐어지고 입에 넣어진 40년 빈티지다. 이것이 음원 플랫폼 시대, 옛 음악의 절대적 장점이다. 새 세대에게 8090 음악은 첨단 팝의 ‘아는 맛’이 아니라 ‘낯선데 알 듯한 맛’이라 귀에 더 잘 붙는다.
1980~90년대는 지금 세대가 공감할 ‘감성의 역사적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거기까지는 닿고 1970년대까진 못 닿는 게 많다. 먼저 음악의 질감과 음향의 측면이다. 1980년대는 신시사이저, 드럼 머신, 시퀀서 등 전자악기가 팝 뮤직의 패러다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디지털 샘플 운용이 가능한 드럼 머신들이 1980년대 초 잇따라 출시됐다. 고막을 ‘팍!’ 때리고 잔향은 비현실적으로 없는 저 기계적 비트를 누구나 만들게 된 것이다. 전자악기의 발달은 말 그대로 신스 팝(synth-pop)의 황홀경을 팝 시장에 선사했다. 80년대발 드럼 머신 사운드는 첨단 팝에도 즐겨 쓰이는 클리셰. 지금 케이팝과 첨단 팝을 장식하는 저 사정 없는 비트의 영토가 1980년대부터다.
문화사적으로 1980년대는 음악이 청각 예술을 넘어 다중 감각의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확장한 시기다. 1981년 미국 MTV가 개국했다. 적당히 괜찮은 음악에 파격적으로 좋은 비주얼이 결합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이때부터 나타났다.
가요사를 보자. 80년대는 세련된 한국식 발라드의 탄생기다. 작곡가 이영훈과 가수 이문세, 싱어송라이터 유재하 등이 선제적으로 꽃 피운 뒤 김현철(1989년 데뷔), 윤상(1990년 데뷔)을 거쳐 90년대에 주류 시장을 점령한다. 80년대는 조용필 신드롬과 함께 ‘오빠 부대’와 젊은 팬덤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8말 9초(80년대 말, 90년대 초)’는 우리 사회문화사에서 격동기였고 이는 댄스 가요를 혁신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율화, 문민정부 출범, 대학가의 탈운동권화, X세대의 등장이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음악적으론 지금은 흔해진 장르 혼합의 실험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1992년 데뷔)을 위시한 새로운 댄스 그룹들은 종종 발라드·댄스는 물론 힙합·레게·록·헤비메탈 등을 한 앨범, 또는 한 곡 안에 뒤섞어 버림으로써 장르 계보를 넘어 요즘 말로 ‘느좋(느낌이 좋다)’만으로 충분한 감각 제일주의 콘텐트를 만들었다. 이는 1996년 H.O.T.의 등장과 케이팝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90년대는 온라인 취향 공동체의 발화점이기도 하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등 PC통신이 나왔다. 반 친구나 직장 동료 말고, 물리적 인접성과 실명(實名)의 한계를 넘은 익명의 원격 동아리가 생겨났다. 부모가 내려주신 성명 대신 아이디로 ‘님들’과 소통하며 요즘처럼 매트릭스 안에서 놀았다. 삐삐, 휴대전화 등 개인 이동통신 기기도 이때 나왔다. 거실의 TV는 아랑곳없이 ‘내 꺼’ 보고 다니며 그 안의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지금 세대와 기술 차원만 다를 뿐 모양새는 큰 차이 없다. 8말 9초는 그래서 2020년대 신인류도 꽤 동질감을 느끼며 여행할 수 있는 정서적 구대륙이다.
몇 년 전 뉴진스(2022년 데뷔)의 레트로 신드롬이 생각난다. 당시 뉴진스는 팬 소통 앱 포닝(Phoning)을 출시했는데 DOS나 초기 윈도우 기반의 PC통신 또는 싸이월드와 닮아 깜짝 놀랐다. ‘아니, 이 감성을 모르는 지금 10대가 여기 공감한다고?!’ 대답은 ‘넵’.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초기 디자인은 신세대에게 직관적으로 친숙하고도 낯설다. 좀 어설퍼서 만만하고, 귀여워서 오히려 좋다. 다른 사람의 피드와 스토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우울해지는, 얄밉게 세련된 요즘 인스타·틱톡에서 해방되는 느낌도 준다. ‘이건 내가 가질 수 있다. 귀여운 키링처럼.’
MZ세대엔 ‘낯선데 알 듯한 맛’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21일 재결합 내한공연을 연 영국 밴드 오아시스를 비롯해 펄프·더 큐어 등이 영국 앨범 차트를 올해 맹폭했다. 밴드 음악과 록 음악이 새로운 세대를 만나는 동안 신스팝, 시티팝은 이 시대 일렉트로 팝, 케이팝의 ‘즐겨찾기’가 됐다.
올해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그룹 하츠투하츠는 20일 낸 새 앨범에 90년대를 잔뜩 묻혀 왔다. 수록곡 ‘Pretty Please’의 뉴잭스윙(new jack swing) 분위기, 귀여운 랩, 장면 전환은 그 시절 S.E.S.의 후속곡이라 해도 믿을 정도.
최근 만난 한 케이팝 제작사 임원은 8090 음악의 회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국 시소가 절로 균형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해외 팝을 받아들여 힙한 후크(hook)와 감각적 리듬을 중심에 둔 아이돌 댄스형 케이팝. 이것이 득세하는 시장에서 한편으론 서정적 가사와 멜로디가 수놓는 한국식 팝의 정통성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자연스레 밸런스를 찾는 과정 아닐까.” 기성세대는 익숙한 음악에서 안온함을, 신세대는 숏폼·유튜브·오토튠 이전의 질감이 살아 있는 음악에서 편안함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도파민 과다 시대는 세기말의 불안과 모종의 정서적 연결고리도 찾고 있다. 올해 틱톡 음악 바이럴 차트 정상에는 라디오헤드의 1997년 앨범 ‘OK Computer’의 ‘Let Down’이 올라왔다. 이 곡을 젊은이들이 하교하는 버스 차창 밖 우울한 정경 위로 연방 깔았다. 음울한 가사 자막과 함께. ‘언젠가, 난 날개를 가질 거야 / 화학반응이지 / 우습고 쓸모없는…’(‘Let Down’ 중) 염세적인 가사에 1997년의 청춘과 2025년의 청춘이 타임슬립 영화처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OK Computer’가 제작된 1997년은 IBM 수퍼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체스 게임에서 이긴 해다.
영포티(young 40), 영피프티(young 50), MZ, 민지…. 세대와 세대 사이에 요즘 서로의 태도와 문화를 조롱하는 문화가 확산한다. 하지만 마주 선 이들은 사실 비슷한 불안과 설렘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피적 풍요, 크고 작은 스크린과 플랫폼이 주는 피로감, 브레이크를 모르는 기술 발달이 막연히 두려운 사람들. 1980~90년대의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퍼스널 컴퓨터, 개인화 기기, 취향 공동체와 함께 스크린 중독, 현실 회피, 익명 게시판과 악플도 쥐어줬듯. 첨단이란 뾰족함 끝에 선 우린 그때나 지금이나 닮은 채로 닳아가고 있다. 플라스틱 나무처럼.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조용필 ‘꿈’ 중)의 상태창. 손안에 쥔 공허의 스크린에 푸른 달로 매일 뜬다. 타향살이에도, 디지털 유목민에게도 유효한 스토리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뮤직 컨설턴트. 하이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강연 했고 BBC, 아사히에 한국 문화에 관한 도움말을 줬다. 한국대 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조용필 티비’ ‘보고 싶다’(얼마 전 만난 방송인 B씨의 휴대전화 케이스에 암호처럼 삐뚤빼뚤 글씨를 남겨둔 2021년생 C양. 추석에 가족들과 다 함께 조용필 콘서트를 봤는데 꼬맹이가 너무 좋았는지 직접 써서 엄마한테 건넸다고.)
지난 6일 방송된 KBS 광복 80주년 기획 콘서트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의 여운이 길다. 전국 평균 시청률 15.7%(닐슨코리아 기준), 분당 최고 시청률 18.2%.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1980~90년대 히트곡이었다. ‘단발머리’(1980), ‘고추잠자리’(1981)를 필두로 ‘허공’ ‘모나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여행을 떠나요’를 지나 ‘꿈’(1991), ‘슬픈 베아트리체’(1992)까지 수많은 명곡이 스쳐 갔다.
숏폼과 OTT로 분절됐던 가가호호에 경계를 넘어 8090 감성이 밀어닥쳤다. ‘고추잠자리’는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실려서도 화제다. 이 영화엔 산울림 김창완의 1983년 솔로 작품 ‘그래 걷자’도 들어갔다. 마침 신승훈·김건모·코요태 등도 오랜만에 컴백했다. 요즘 중고생들을 만나 알고리즘이나 플리(플레이리스트) 이야기를 꺼내면 ‘조용필 아저씨 노래에 꽂혔다’ ‘김건모 노래, 신박하고 좋다’는 반응이 심심찮게 돌아온다.
광복 80주년 조용필 콘서트 시청률 18%
이 현상을 라면에 비유해 보고 싶다. 1983년 9월 13일 출시된 안성탕면 ‘초판’은 지금 맛볼 수 없다. 라면 박물관에 가면 봉지나 디자인은 볼 수 있겠지만. 유통기한 42년짜리 라면은 없다. 하지만 1985년에 나온 들국화 1집의 ‘행진’이나 1963년 발매된 비틀스 1집의 ‘Love Me Do’는 어떤가. 당일 서울스튜디오나 EMI 스튜디오(런던)에서 갓 구워 나온 그 상태 그대로, 내 휴대전화 속 앱에서 2025년에 따끈따끈 똑같이 즐길 수 있다. 20세기 음악은 음원 서비스의 시대를 만나 2025년 10월 현재에도 신선식품이다.
그러니까 20세기의 대기를 마셔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8090 음악은 마치 막 뜯어 지금 끓여 먹을 수 있는 안성탕면 초판 같은 거다. 불닭볶음면, 마라탕에 물려갈 때쯤 손에 쥐어지고 입에 넣어진 40년 빈티지다. 이것이 음원 플랫폼 시대, 옛 음악의 절대적 장점이다. 새 세대에게 8090 음악은 첨단 팝의 ‘아는 맛’이 아니라 ‘낯선데 알 듯한 맛’이라 귀에 더 잘 붙는다.
1980~90년대는 지금 세대가 공감할 ‘감성의 역사적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거기까지는 닿고 1970년대까진 못 닿는 게 많다. 먼저 음악의 질감과 음향의 측면이다. 1980년대는 신시사이저, 드럼 머신, 시퀀서 등 전자악기가 팝 뮤직의 패러다임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디지털 샘플 운용이 가능한 드럼 머신들이 1980년대 초 잇따라 출시됐다. 고막을 ‘팍!’ 때리고 잔향은 비현실적으로 없는 저 기계적 비트를 누구나 만들게 된 것이다. 전자악기의 발달은 말 그대로 신스 팝(synth-pop)의 황홀경을 팝 시장에 선사했다. 80년대발 드럼 머신 사운드는 첨단 팝에도 즐겨 쓰이는 클리셰. 지금 케이팝과 첨단 팝을 장식하는 저 사정 없는 비트의 영토가 1980년대부터다.
문화사적으로 1980년대는 음악이 청각 예술을 넘어 다중 감각의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확장한 시기다. 1981년 미국 MTV가 개국했다. 적당히 괜찮은 음악에 파격적으로 좋은 비주얼이 결합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이때부터 나타났다.
가요사를 보자. 80년대는 세련된 한국식 발라드의 탄생기다. 작곡가 이영훈과 가수 이문세, 싱어송라이터 유재하 등이 선제적으로 꽃 피운 뒤 김현철(1989년 데뷔), 윤상(1990년 데뷔)을 거쳐 90년대에 주류 시장을 점령한다. 80년대는 조용필 신드롬과 함께 ‘오빠 부대’와 젊은 팬덤이 발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8말 9초(80년대 말, 90년대 초)’는 우리 사회문화사에서 격동기였고 이는 댄스 가요를 혁신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율화, 문민정부 출범, 대학가의 탈운동권화, X세대의 등장이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음악적으론 지금은 흔해진 장르 혼합의 실험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1992년 데뷔)을 위시한 새로운 댄스 그룹들은 종종 발라드·댄스는 물론 힙합·레게·록·헤비메탈 등을 한 앨범, 또는 한 곡 안에 뒤섞어 버림으로써 장르 계보를 넘어 요즘 말로 ‘느좋(느낌이 좋다)’만으로 충분한 감각 제일주의 콘텐트를 만들었다. 이는 1996년 H.O.T.의 등장과 케이팝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90년대는 온라인 취향 공동체의 발화점이기도 하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등 PC통신이 나왔다. 반 친구나 직장 동료 말고, 물리적 인접성과 실명(實名)의 한계를 넘은 익명의 원격 동아리가 생겨났다. 부모가 내려주신 성명 대신 아이디로 ‘님들’과 소통하며 요즘처럼 매트릭스 안에서 놀았다. 삐삐, 휴대전화 등 개인 이동통신 기기도 이때 나왔다. 거실의 TV는 아랑곳없이 ‘내 꺼’ 보고 다니며 그 안의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지금 세대와 기술 차원만 다를 뿐 모양새는 큰 차이 없다. 8말 9초는 그래서 2020년대 신인류도 꽤 동질감을 느끼며 여행할 수 있는 정서적 구대륙이다.
몇 년 전 뉴진스(2022년 데뷔)의 레트로 신드롬이 생각난다. 당시 뉴진스는 팬 소통 앱 포닝(Phoning)을 출시했는데 DOS나 초기 윈도우 기반의 PC통신 또는 싸이월드와 닮아 깜짝 놀랐다. ‘아니, 이 감성을 모르는 지금 10대가 여기 공감한다고?!’ 대답은 ‘넵’.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초기 디자인은 신세대에게 직관적으로 친숙하고도 낯설다. 좀 어설퍼서 만만하고, 귀여워서 오히려 좋다. 다른 사람의 피드와 스토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우울해지는, 얄밉게 세련된 요즘 인스타·틱톡에서 해방되는 느낌도 준다. ‘이건 내가 가질 수 있다. 귀여운 키링처럼.’
MZ세대엔 ‘낯선데 알 듯한 맛’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21일 재결합 내한공연을 연 영국 밴드 오아시스를 비롯해 펄프·더 큐어 등이 영국 앨범 차트를 올해 맹폭했다. 밴드 음악과 록 음악이 새로운 세대를 만나는 동안 신스팝, 시티팝은 이 시대 일렉트로 팝, 케이팝의 ‘즐겨찾기’가 됐다.
올해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그룹 하츠투하츠는 20일 낸 새 앨범에 90년대를 잔뜩 묻혀 왔다. 수록곡 ‘Pretty Please’의 뉴잭스윙(new jack swing) 분위기, 귀여운 랩, 장면 전환은 그 시절 S.E.S.의 후속곡이라 해도 믿을 정도.
최근 만난 한 케이팝 제작사 임원은 8090 음악의 회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국 시소가 절로 균형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해외 팝을 받아들여 힙한 후크(hook)와 감각적 리듬을 중심에 둔 아이돌 댄스형 케이팝. 이것이 득세하는 시장에서 한편으론 서정적 가사와 멜로디가 수놓는 한국식 팝의 정통성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자연스레 밸런스를 찾는 과정 아닐까.” 기성세대는 익숙한 음악에서 안온함을, 신세대는 숏폼·유튜브·오토튠 이전의 질감이 살아 있는 음악에서 편안함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도파민 과다 시대는 세기말의 불안과 모종의 정서적 연결고리도 찾고 있다. 올해 틱톡 음악 바이럴 차트 정상에는 라디오헤드의 1997년 앨범 ‘OK Computer’의 ‘Let Down’이 올라왔다. 이 곡을 젊은이들이 하교하는 버스 차창 밖 우울한 정경 위로 연방 깔았다. 음울한 가사 자막과 함께. ‘언젠가, 난 날개를 가질 거야 / 화학반응이지 / 우습고 쓸모없는…’(‘Let Down’ 중) 염세적인 가사에 1997년의 청춘과 2025년의 청춘이 타임슬립 영화처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OK Computer’가 제작된 1997년은 IBM 수퍼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체스 게임에서 이긴 해다.
영포티(young 40), 영피프티(young 50), MZ, 민지…. 세대와 세대 사이에 요즘 서로의 태도와 문화를 조롱하는 문화가 확산한다. 하지만 마주 선 이들은 사실 비슷한 불안과 설렘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피적 풍요, 크고 작은 스크린과 플랫폼이 주는 피로감, 브레이크를 모르는 기술 발달이 막연히 두려운 사람들. 1980~90년대의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퍼스널 컴퓨터, 개인화 기기, 취향 공동체와 함께 스크린 중독, 현실 회피, 익명 게시판과 악플도 쥐어줬듯. 첨단이란 뾰족함 끝에 선 우린 그때나 지금이나 닮은 채로 닳아가고 있다. 플라스틱 나무처럼.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 어디가 늪인지 / 그 누구도 말을 않네’(조용필 ‘꿈’ 중)의 상태창. 손안에 쥔 공허의 스크린에 푸른 달로 매일 뜬다. 타향살이에도, 디지털 유목민에게도 유효한 스토리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뮤직 컨설턴트. 하이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강연 했고 BBC, 아사히에 한국 문화에 관한 도움말을 줬다. 한국대 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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