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빠진 파리' 부르던 시인 김광균, 무대 위 시로 살아나다

유주현 2025. 10. 2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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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피아니스트 조재혁, 배우 김미숙,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사진 하슬라국제예술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한다.’(김광균 ‘추일서정’ 중에서)

김광균(1914~93)은 시각적 이미지즘을 확대한 공감각적 시어들로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이끈 대표 시인이다. 그가 노래한 가을날의 서정이 노래로, 피아노로, 첼로로, 그림으로, 미디어아트로, 낭독으로 살아났다.

21일 강릉아트센터에 오른 제 2회 하슬라국제예술제(예술감독 조재혁)의 메인 공연 ‘추일서정’은 이제껏 본적 없는 시적인 무대였다. 문학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요즘 음악계 트렌드 속에서도 시의 이미지에 천착한 첫 시도다. 강릉의 옛 이름을 따 지난해 출범한 하슬라국제예술제는 클래식 음악을 기반으로 발레·문학 등 다양한 장르와의 ‘연결’을 모토로 삼고 있는데, 올해는 김광균의 시가 작곡가 최우정에게 우선 연결됐다.

최우정은 작곡을 넘어 스스로 드라마터그가 되어 시를 고르고 무대를 구성했다. ‘음악의 안내를 받으며 시의 풍경 속을 거니는 무대’랄까. 시에서 감각되는 이미지와 바람, 파도, 비 같은 소리와 음악이 교차됐다. 무대 전체를 은은히 감싼 반투명 샤막에 절친했던 화가 김환기의 그림이 투사되고 시어들이 낙엽처럼 흩날리는 미디어아트도 함께 시인의 ‘공감각’을 형상화했다.

시인이면서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노신’ 중에서)라고 했던 김광균 내면의 풍경은 쓸쓸한 가을날을 닮았다. 초연된 가곡 ‘목련’과 ‘와사등’은 조재혁이 직접 가사를 영역했고,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도시인의 고독을 소프라노 이명주와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의 감성적인 가창에 실었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는 구절로 익숙한 대표작 ‘설야’ 등은 바람, 기적 소리와 함께 조재혁의 피아노와 요나단 루제만의 첼로 연주가 배우 김미숙의 낭독을 서포트했다. 슈베르트의 가곡 ‘물위에서 노래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모르겐’ 등도 시인의 심상과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사무엘 윤이 1930년대 시인이 처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슈베르트 가곡 ‘도플갱어’로 토해낼 땐 순간 오페라 무대로 변신했고, 시인이 기분 좋을 때 불렀다는 샹송 ‘술레 퐁드 빠리’(Sous Les Ponts De Paris·술에 빠진 파리라며 장난스럽게 부른다)를 재현할 땐 시인이 살아 돌아온 듯 객석도 들떴다. 시인의 장녀 영자씨는 “아버지 친필과 일기도 나오고 가족들이 모일 때 늘 부르시던 술에 빠진 파리를 들으니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공연을 제작한 외손녀 허인영 인아츠프로덕션 대표도 “몇 해 전 독일에서 르노 카퓌송의 바이올린 연주와 시인의 낭독이 어우러진 공연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나를 특히 예뻐하시던 할아버지와 주말마다 미술관에 가던 생각이 많이 났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추일서정’은 시작부터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다. 내년 한국어를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한 아비뇽 페스티벌 참가를 타진하고 있다니 타이밍도 좋다. K문학의 아름다움이 곧 무대 언어를 통해 퍼져갈 수도 있겠다.

강릉=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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