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기

박준 시인 2025. 10. 2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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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쓰기] (37)

오랜만에 마주한 선배의 얼굴은 한결 좋아 보였다. 차분하면서도 밝았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가면서도 순간순간 맑게 웃었다. 선배는 연구실에 나를 데려가 따뜻한 차를 한잔 내려줬다. 생각해 보니 처음 선배를 만난 곳도 대학 연구실이었다. 선배는 그때 양손 가득 택배며 우편물을 들고 있었고, 물건 주인은 나와 면담하고 있는 교수였다. 선배는 그때부터 학과 일을 도맡아 했고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일러스트=유현호

처음에는 근로 장학생이라 했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며 연구 조교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선배의 일과 입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때 나는 그런 선배를 답답하게 여겼다.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고 우직하게 매사를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번은 취기를 빌려 제발 요령도 피우고 부당한 지시 앞에서는 싫은 내색도 하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선배는 별말 없이 웃었다. 쓴웃음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선배는 여전히 강의실과 학과 사무실과 교수 연구실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얼마 전 선배에게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운 좋게도 한 대학에 임용됐는데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답장 서두에 선배가 그 자리에 오른 건 운이 아니라 그간의 노력 덕분이라고 적었다.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안고 버선발로 찾아가겠다고도 전했다.

약속 당일,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강연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선배는 가까운 기차역까지 나를 배웅해 줬는데, 역에 도착할 무렵 예보에 없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배는 자동차 트렁크에 우산이 있다며 그것을 쓰면 될 거라고 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작은 우산을 꺼내 든 선배가 잠시 머뭇거렸다. “준아, 이 우산이 뭐라고 아까운 생각이 들까. 미안한데 이 우산은 못 줄 것 같아. 몇 년 전 외국 여행 갔다가 놀이공원에서 사 온 건데 이제 여행의 기억은 지워지고 이 우산 하나만 남았어.” 선배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말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멋있다고, 귀엽다고. 선배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 처음 본다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우산만도 못한가?’ 같은 자괴감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만약에 선배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아끼는 우산을 내게 줬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나는 우산을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산은 잃어버리고 사고 또 잃어버리는 소모품 같은 것이니까. 선배는 냉가슴을 앓았을 것이다. 아끼는 우산을 덥석 받아 간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명명백백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은 순간이 있다. 이는 거짓과는 구별된다. 반면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미덕이 될 때도 있다. 이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물론 이 두 상황을 분별하기는 늘 어렵다. 어렵기에 순간순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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