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랩 스타의 부재, 시스템만 문제일까? [콘텐츠의 순간들]

강일권 2025. 10. 2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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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은 태생적으로 ‘마초적 서사’에 기대어 성장해왔다. 여성 아티스트들은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레이블과 미디어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방송에서 사라졌던 랩·힙합 예능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당장 10월16일부터 엠넷에서 〈언프리티 랩스타: 힙팝 프린세스〉가 방영되며, 내년에는 그 유명한 〈쇼미더머니〉 새 시즌이 계획되어 있다. 프로그램 소식을 연이어 접하자 다시금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왜 한국 힙합에서는 여성 랩 스타를 볼 수 없을까?’ 여전히 윤미래의 입지를 넘어서는, 아니 버금가는 수준의 여성 래퍼조차 꼽기 어렵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랩 스타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몇몇 래퍼 이름을 떠올리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제시, 이영지, 치타, 미료, 재키와이, 미란이, 스월비, 카모, 릴 체리 등···. 그런데 실력·커리어·대중적 인지도를 모두 조합했을 때 과연 그들을 ‘랩 스타’라 부를 수 있는지 다소 의문이 든다. 일부는 히트곡이 있지만 실력이나 음악 커리어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 보인다. 음악보다 예능으로 더 유명한 이들도 있고, 음악적으로 인정받았을지언정 활동이 뜸하거나 장르 신을 넘어선 파급력을 보여주지 못한 이도 있다.

2018년 7월5일 윤미래가 새 앨범 <제미나이 2> 음악 감상회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랩 스타가 등장하기 어려운 현실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다. 이는 단순히 시장의 문제를 넘어 힙합계 전반에 걸친 구조적·문화적 모순에서 비롯한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힙합은 태생적으로 ‘마초적 서사’에 기대어 성장해왔다. 권력·부·거리에서의 생존을 노래하는 과정에서 남성성은 곧 ‘진정성’의 기준이 되었고, 여성은 종종 그 진정성을 보완하거나 치장하는 존재로 소비됐다. 특히 가사나 이미지 측면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이른바 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힙합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의 몫이었고, 여성 아티스트들은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레이블과 미디어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성 래퍼를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에 맞춰 상품화하거나 남자 래퍼들 사이에 놓인 희소한 상품으로 포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여성 래퍼 한두 명의 성공을 마치 전체의 진보인 양 과장했다. 이 때문에 여러 여성 래퍼가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의 공간은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 니키 미나즈가 한동안 거의 유일한 메이저 여성 래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도 독보적인 랩 실력만이 아니라 이런 산업구조가 한몫했다. 그만큼 여성 래퍼에게 힙합 신은 각박한 세상이다.

산업과 문화 전반에 뿌리내린 편견

심지어 여성 래퍼는 그 속에서 이중 잣대와도 싸워야 했다. 예컨대 힙합이 태생적으로 요구하는 자의식과 자기과시는 여성이 주체가 되었을 때 종종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기 위해 남성 래퍼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 남성 래퍼는 남성미만 과시해도 충분했지만, 여성 래퍼는 여자로서의 매력뿐 아니라 여자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관을 깨는 매력까지 호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공을 위해 이중적이어야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랩 스타 이브는 2024년 캐나다 공영방송 CBC 인터뷰에서 힙합 크루이자 레이블인 러프 라이더스에 합류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남자들로 가득 찬 방에 들어서는 순간 긴장했지만,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임해야 했어요. (그들에게) 내가 단순히 여자로서만 뛰어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요. 나는 여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렇듯 힙합 시장에 만연한 모순적 요구는 여성 래퍼들에게 무형의 압력으로 작용하며, 그들을 언제나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여성 래퍼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 결과 실력과 개성을 겸비한 여성 래퍼들은 점차 판을 바꿔나가고 있다. 카디 비, 메건 디 스탤리언, 도이치, 랩소디 등 오랫동안 가뭄이었던 여성 랩 스타도 늘어났다. 산업과 문화 전반에 뿌리내린 편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이상 이들의 성공이 개별적 돌파구로 남을 위험도 있지만, 현재 상황이 매우 고무적이긴 하다.

한국 힙합 신에서는 좀처럼 변화의 조짐을 느끼기 어렵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와 힙합 신이 교차하며 형성한 구조적·문화적 제약이 더욱 엄격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여성 래퍼들은 사회적 젠더 편견에 적극 맞서왔다. 저마다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힙합 음악에 내재한 여성혐오를 비판하며 여성의 존재를 능동적 주체로 재배치하고자 힘썼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레 여성주의·여성운동과도 연결되면서 단순한 음악을 넘어 연대의 일부로 작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같은 주제의 랩은 환영받지 못한다. 범대중적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페미니즘 자체가 비하 용어로 사용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욕망과 권력을 노래하는 여성 래퍼는 같은 주제를 뱉는 남성 래퍼보다 품위 논란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사회 분위기 탓이다. 그렇다 보니 여성 래퍼들은 신 안팎에서 이미지 관리의 부담을 크게 질 수밖에 없다. 메건 디 스탤리언 같은 래퍼가 자신의 성적 매력을 내세워 여성의 주체적 선택과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이것이 페미니즘 담론과 맞물리며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광경은 한국에서 아직 먼 얘기다.

방송 시스템과 시장의 한계도 있다. 이곳에서는 여성 래퍼에게 암묵적으로 희소성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여성 래퍼들은 가뜩이나 작은 힙합 시장 안에서도 더 작은 지분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구도에 놓인다. 물론 미국 힙합 신의 상황도 비슷했지만, 애초에 시장 규모가 다르다 보니 한국 힙합과 비교하기에는 무리다. 이처럼 여성 래퍼의 성공은 결국 사회적 맥락과도 깊이 연결된다.

이런 악조건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냉정하게 말하자면, 음악적 자질이 충분한 여성 래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자기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노력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기술은 늘었지만, 정작 중요한 랩 실력과 앨범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처참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개성이 엿보이는 래핑을 구사하는 이가 드문 현실은 차치하고 대부분 톤과 플로에서 기본기를 갖추지 못했다. 가사도 그렇다. 주제와 표현의 한계가 뚜렷하다. 기존 남성 래퍼들이 보여준 자기과시와 개인 서사 클리셰를 답습하는 데 그친다. 혹은 미국의 여성 래퍼들이 부각해온 섹스어필을 흉내 내기에만 급급하다. 완성도 있는 여성 래퍼의 앨범도 몇 장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한국 힙합에서 여성 랩 스타의 부재를 단지 시스템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설령 거시적 원인을 어느 정도 해결한다 해도 아티스트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을 바꾸는 건 불가능할 터이다. 미국 힙합 신에서 부조리한 구조를 극복하고 변화와 결과를 만들어낸 건 래퍼들이었다. 그들의 뛰어난 래핑과 탁월한 가사 미학이 여성 랩 스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한국 힙합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꽤 명확해 보인다.

강일권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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