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한국의 86 정치인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5. 10. 23.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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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68 혁명은
지성 영역에서 빛나는 운동
권력·사익 추구는 드물어
한국 86 정치인들은 ‘쭉정이’
무교양·반지성 운동의 필연
민주주의마저 무너진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 의원은 15일 MBC 라디오에 출연해 "제가 운동권 핵심이었다"고 주장했다. /뉴스1

바야흐로 ‘386 전성시대’다. 1996년쯤 운동권 출신들이 자기들 모임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줄여 만든 용어라는 설도 있고, 그 무렵 최신형 컴퓨터 모델 ‘386′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 바로 그 386 말이다. 아직 공식 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각종 사전형 웹사이트에는 386(세대)이라는 항목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사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 486, 586이라고도 한 그들의 오늘날 통칭은 그냥 ‘86’이다.

2000년대 초 존재감을 크게 높인 386은 노무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 이후 ‘폐족(廢族)’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에게 이재명 정부에서 ‘386 세상’이 열리고 있다. 우선 국무총리와 집권 여당 대표부터 ‘진386’이다. 장관직 상당수도 그들 차지다. 이른바 권력 실세 빅5 가운데 하나라는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그쪽 인물이다. 국회의장과 국정원장도 직전 세대 학생운동권 출신 ‘범386’이며, 민주당 국회의원 가운데 70명 이상이 학생회나 운동권과 연관돼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의 우당(友黨)이자 현재 원내 제3당 비대위원장은 386 간판 스타였다.

단순한 숫자나 자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의 ‘거침없는 하이킥’이다. “대통령도 갈아치웠다”는 식의 무용담은 결코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아닌 듯하다. 정치권 내부는 이들의 동업자로 넘쳐나고, 이들의 우호 세력이 포진한 법조계·언론계·노동계·학계·문화예술계도 난공불락 진지(陣地)처럼 보인다. 대한민국 권력장(權力場)의 안방 진입에 성공한 이들은 이제 권력의 최후 고지를 향해 전진할 태세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수십 년에 걸친 지독한 권력 의지의 승리가 아닐까 싶다.

1968년 68운동 당시 프랑스 학생운동 지도부. /연합뉴스

학생운동의 세계사적 대명사는 서구의 68혁명이다. 1960년대 말 냉전 체제와 경제적 풍요를 배경으로 선진 민주·자본주의 체제 나름의 권위주의와 위계질서에 도전한 격렬한 사회변혁 운동 말이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 대학발(發) 사회혁명으로 이후 서구권의 사회변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68혁명은 기본적으로 ‘지도자 없는 운동’이었다. 참여자 가운데 훗날 스스로 권력자로 변신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정치인이 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직분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처럼 단순 학생운동 경력자가 ‘여의도 정치꾼’으로 직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의 86과 달리 서구의 68이 남긴 유산은 권력 세계가 아니라 지성 영역에서 더욱 빛난다. 가령 68혁명은 좌파 내부에서 신(新)마르크스주의가 분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비폭력적 의회주의 방식에 따른 자본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논의하고 실험하기 시작했다. 68혁명이 촉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주의가 자임해 오던 이성과 합리주의, 사회적 계몽, 권력의 공공성, 지식 및 과학의 보편성 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류 문명의 대안적 미래를 제시했다.

소통과 대화, 숙의에 기반한 공론장 재구성을 통해 합리성과 근대주의의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비판 사회학’도 68혁명의 결실 중 하나였다. 한국의 민주화 세대 지식인들에게 큰 울림이 된 바로 그 사회 이론 말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유별나게 열광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 역시 이론적 모태는 68혁명이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나라이던 미국에서 존 롤스(John Rawls)가 철학적 언어로 평등과 복지 논리를 정립한 데는 68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68을 ‘사태’가 아닌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86은 지성사적 측면에서 볼 때 쭉정이에 가깝다. 아직도 반제국주의·반봉건 이념이나 민중주의 계급론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들의 정신세계는 대학 시절부터 체질화된 무교양·반지성주의의 필연적 대가로 보인다. 86과 똑같이 서구의 68은 학생운동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서구의 68이 역사의 진보에 적잖이 공헌하며 인류 공통의 지적 자산으로 남은 반면, 이렇다 할 지적 성찰이나 진화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의 86은 날이 갈수록 사익과 권력욕으로 얼룩지고 있다. 바로 그런 이들 손에 온 국민의 피땀이 어린 공든 탑, 민주주의 또한 무참히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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