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경체] 과거 시험에 과외·족보도 성행…여전했던 조선의 '교육열'
[EBS 뉴스]
서현아 앵커
요즘도 자녀 교육비가 부담이지만, 사실 조선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출세의 유일한 길이 과거시험이었고, 그걸 준비하려면 집안 재산이 바닥나기 일쑤였다고 하는데요.
청소년 경제 체력 기르기 프로젝트, 오늘은 조선시대 사교육의 세계를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한 사람의 인생은 물론 집안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다고 하죠.
시험 준비에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었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조선시대 양반은 신분이기도 했지만 자격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양반 집안의 자식이라고 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몰락한 양반이 되어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평생 노력해야 했습니다.
다만 그 시험준비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는데요.
책, 종이, 붓 모두 값비싼 것이었고 특히 과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과시험이 한양에서만 치러젔기 때문에 지방의 양반들이라면 한양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큰 돈이 들었습니다.
지방의 양반들은 땅을 팔아 시험비용을 마련했고, 과거시험 준비하다가 가난해지는 사람은 몹시 많았습니다.
서현아 앵커
시험을 준비하려면 교재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당시 책값이 아주 비쌌다고 하는데 당시엔 왜 책이 그렇게 귀했던 겁니까.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아무래도 예전에는 종이도 무척 귀했거니와 책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금속활자나 나무활자가 있기는 했지만 요즘 인쇄술만큼 책을 빠르게 만들지 못했고, 또한 과거시험에서 나오는 책들은 권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논어, 맹자만 해도 각각 7, 8권이었고 많았고 자치통감은 294권에 이를 정도였거든요.
이렇다보니 과거시험을 공부하려고 해도 책을 갖추는 것부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양반들이나 책을 넉넉히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 해도 자식들에게 유산분배를 할 때 공부를 잘 하는 손자가 있는 집에 책을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헌책방이 인기가 있었는데 책이 워낙 귀하다보니 헌책이라도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현아 앵커
지방에서 한양까지 올라가 시험을 보려면 숙식비,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실제로는 어떤 비용들이 들었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역시 여행비용과 숙박비가 가장 비쌌습니다.
예전 양반들은 여행할 때 절대로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타고 갈 말, 그리고 말을 이끄는 몸종 이렇게 해서 사람 둘에 말 하나가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 둘 체제비에 말 먹이까지 들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 지낼 곳이었습니다.
정조 때 노상추라는 양반은 경북 선산에서 시험보러 와서 묵을 곳이 없어 친구의 노비네 집에서 잤는데, 노비가 정말 싫은 티 내며 자신을 구박을 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참았습니다.
그 정도로 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죠.
이 당시 한 번 과거시험보러 한양을 다녀오면 돈 40냥 정도가 들었는데 웬만한 가정의 1년 생활비였다고 합니다.
서현아 앵커
요즘으로 치면 '과외 선생'도 있었다죠.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사례를 보면 자식 공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기록도 있다는데, 이런 교육 문화가 일반적이었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건 아주 먼 옛날 유교경전에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서로 자식을 바꿔 가르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자식을 가르치다보면 화도 내고 그렇게 된다는 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사실 공교육 혹은 학교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는 시점이 오게 됩니다.
화를 내서.
그렇게 되면 남에게 가르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절에 가서 공부하게 하거나 아니면 선생에게 보내거나 합니다.
후자라면 서당이 대표적이지요.
부모들은 부디 우리 애 공부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하며 서당에 보냈는데 이것도 양반의 자식이거나 아니면 양인이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했습니다만, 그 때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신나게 놀러다닌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서현아 앵커
성균관 근처 천민 출신 선생에게 100명 넘게 몰렸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이런 사례는 당시 교육의 어떤 현실을 보여주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아무래도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공부를 잘 해서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결과를 바라기 마련인데,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선생의 신분이나 직업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앞서 말한 이규보가 자식의 공부를 부탁한 사람은 신대장이라 했는데 실제로 관직도 낮은 사람이었지만 공부 잘 가르친다 해서 보낸 것이었고, 조선시대는 성균관 근처에서 반인 그러니까 천민 출신의 학원선생 정학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잘 가르쳐서 과외 붙여준다는 소문이 들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100명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즉, 옛날 사람들도 합격할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만큼 과거 시험이 치열했고 그만큼 학부모들 및 학생들도 다급했다고 하겠습니다.
서현아 앵커
과거 시험에도 지금으로 따지면 문제집이 있었다고 하죠.
과거시험 요약집이 인쇄까지 됐다는데, 이런 걸 보면 조선에도 '입시 산업'이 이미 있었던 걸까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앞서 말한대로 조선시대 과거 시험 과목들은 너무나도 범위가 넓고 책의 권수가 많아 이걸 다 장만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가 이걸 읽고 요약한 책, 초집 혹은 정수.
요즘 말로는 엣센스 책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유학자들은 자기가 직접 읽고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 말했지만 마음 급한 수험생들이 어찌 그럽니까.
그냥 초집만 보고 시험보고 심지어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다가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 요약본만 보고 공부한 젊은 것들의 비판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지만 아무래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초집들은 여러 것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명작들이 살아남았고, 이런 것들은 무려 인쇄되기까지 했습니다.
책 인쇄 비용이 엄청나게 비쌌는데도 말이지요.
심지어 조선 문종 때는 국가의 인쇄소를 동원해서 역대 과거 논술시험의 명답안지 모음을 인쇄하기까지 했는데, 불법이었지만 높은 관리들이 많이 관여해서 수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의 입시에는 누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걸 이용해서 문제집을 팔거나 직전 과외를 해주거나, 좋은 선생을 소개해주는 입시사업은 그 때도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공을 들인만큼 많이 급제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은 정말 어리석은 쳇바퀴를 계속 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현아 앵커
"조선의 과거시험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집안의 경제력과 출세 열망이 얽힌 거대한 산업이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는데요.
시대는 달라도 '입시 경쟁의 그림자'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작가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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