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비츠 “능력주의, 엘리트 특권세습 돕는 사회적 기술로 전락”

한귀영 기자 2025. 10. 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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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미래포럼ㅣ기조발제
④ 대니얼 마코비츠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
‘능력주의의 함정 : 엘리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
대니얼 마코비츠 미국 예일대 로스쿨 법학 교수가 23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에서 `능력주의의 함정:엘리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를 주제로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능력주의는 승자처럼 보이는 엘리트에게도 과로와 자기 소외를, 실패한 이들에게는 모욕을 안겨, 포퓰리즘의 득세, 민주주의 위기로 이어진다.”

대니얼 마코비츠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는 23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한겨레신문사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한 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의 오후 세션에서 ‘능력주의는 어떻게 함정에 빠졌나’라는 주제의 기조연설을 통해 “능력주의는 엘리트가 특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도록 돕는 사회적 기술이 됐다”고 강조했다.

능력주의는 인종, 성별, 계급과 같은 고정된 집단 정체성보다는 개인의 다양한 성취를 기준으로 사회적 혜택을 분배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혈통이나 부의 세습체제에 견줘 혁신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현실의 능력주의는 ‘공정’을 내세워 엘리트가 기회를 독점하는 체제로 변질됐다. 마코비츠는 능력주의가 기회균등을 촉진하기보다 차단하는 체제로, ‘귀족주의 세습’을 대신하는 ‘능력주의적 세습’이라고 비판했다. ‘엘리트 세습’(원제 ‘능력주의의 함정’)의 저자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는 부와 출신이 아닌, 덕목과 재능을 기반으로 ‘자연스러운 귀족’을 만들어냈다”며 “기존의 귀족적 특권은 쇠퇴했지만 능력과 부지런함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능력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의 핵심 덕목으로 폐쇄적인 귀족 엘리트와 달리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다는 점과 유능하고 생산성 높은 엘리트를 배출해 공익에 부합하도록 한다는 점을 꼽았다. 또 성과 인종적으로 폐쇄적이었던 귀족 엘리트와 달리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을 내세운 능력주의는 이제 기회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엘리트들은 자녀를 위해 최적의 훈련과 교육을 집중적으로 투자해 자신들의 자녀들이 뛰어난 능력주의자가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특권을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그는 “상위 1% 가정이 자녀 한 명에게 쏟는 투자 비용이 1000만~1500만 달러에 이른다”며 ‘능력주의적 상속’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미국에서 소득 상위 1%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사회 이동성은 감소하면서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아이비플러스 대학(미국의 최상위 대학 그룹)에서 상위 1% 부모를 둔 학생의 비율은 하위 50% 가정 출신 보다 수십 배 높다”고 지적했다.

능력주의는 중간 기술을 가진 중산층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능력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높은 소득이 높은 생산성에 기반한다며 소득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기술 발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며, 이들의 생산성은 공익과 어긋나고 있다”며 “초고소득 노동자의 생산성은 불평등 자체에 의존하며, 불평등이 그들의 능력을 만들고, 그 능력이 다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능력주의의 함정을 ‘인적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석유나 금 등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오히려 경제 발전이 정체되고 민주주의가 약화되는 ‘자원 저주’ 함정에 빠지듯이, 오늘날 능력주의는 인재라는 자원을 초고학력, 초고소득층에 집중시켜 저성장과 정체를 낳는다는 것이다.

마코비츠 교수는 한국 사회도 능력주의가 공정성, 사회적 이동성을 떨어뜨리면서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엘리트들이 자녀 교육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면서 능력주의가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세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경제적 지위별 대학진학률 차이가 보여주듯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 격차가 자녀 성취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위험한 것은 민주주의 토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구조가 지속할 경우 사회적 이동성은 급격히 떨어지고 정치적 극단주의가 확산할 것이다.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가 자신의 도덕적 정합성을 상실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에서 붕괴한다”고 경고한다. 그는 또 능력은 이미 ‘허상’이 되었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며, 능력주의가 전제하는 우월성 중심 사고를 ‘탁월성’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능력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적이기에, 남보다 뛰어날 때 가치를 부여하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반면 탁월함은 가치 있는 일을 충분히 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기준이 되며,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이어야 한다는 실질적 기준을 갖는다.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 함정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월성에 기반한 능력주의 시스템을 탁월성을 중시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소장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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