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미스터리 ‘쪽지’는 과연 누가 보냈나···윤가은 감독, ‘세계의 주인’을 만나다

이민경 기자 2025. 10. 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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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성인 배우들과의 첫 작업ㄺ
윤가은 감독 “이야기가 나를 끌고가”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에서 신인배우 서수빈(오른쪽)이 주인공 이주인을 연기했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2016년 ‘우리들’로 장편 데뷔한 윤가은 감독이 2019년 ‘우리집’을 거쳐 내놓은 ‘세계의 주인’이 22일 개봉했다.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줄곧 그려내던 윤 감독은 이번엔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나잇대를 훌쩍 올렸다. 실제로는 20대 초중반의 배우들이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완성한 장면도 있는데, “이같은 경험은 처음이었고, 솔직히 너무 편했다”고 윤 감독은 웃으며 말했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주인공 이주인(서수빈)이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서 자기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주인’이라는 뜻의 중의적인 작명이 돋보인다. 지난 15일 언론시사를 앞두고 윤 감독은 직접 쓴 손 편지를 건네며 주인이가 겪은 특정 사건을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로 공개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사실 그 사건이 주인이가 사는 세계를 이따금씩 뒤흔드는, 그녀의 주체성을 더 일깨우는 도전이 되기에 이에 대한 언급 없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소개하기 퍽 난감했다. 그럼에도 윤 감독은 “주인이를 만나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를 겉에서부터 안으로 순서대로 알아가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윤가은 감독을 만나 인터뷰했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왈가닥, 인싸, 중상위권 성적을 받는 모범생, 남동생을 꽉 잡고있는 권위있는 누나, 남자친구가 끊이지 않는 의외의 팜파탈…. 상당히 입체적이지만 왜 주인이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 영화의 초반부가 이어진다. 어느날 반 친구가 동네에 거주하는 강력 범죄자의 퇴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주인이에게 강요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교생 중 유일하게 주인이만 서명을 거부한다. 성명서에 써있는 문구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인생을 망가트렸다’는 가해자를 꾸짖는 의도로 적혔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면 피해자의 인생은 망가졌고, 그 상처는 회복 불능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모양새다. 주인은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범죄를 당한 피해자, 이를 이겨내고 누구보다 밝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라는 비밀이 드러나자 주인공의 미세한 심리 변화를 포착하려 눈을 크게 뜨게 된다. 세상이 폭력적으로 붙이는 주홍글씨를 과연 주인은 어떻게 이겨낼까, 혹 패배하는 것은 아닐까, 함께 전전긍긍하게 된다.

주인이 다니는 태권도장 관장님과 주인의 책상에 자꾸만 배달되는 미스터리한 쪽지는 이같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곤 한다. 수업시간 외에도 혼자 도장에서 훈련하는 주인에게 관장님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혼자 있을 땐 꼭 문 잠궈라”고 경고한다. “나는 너의 비밀을 안다”는 쪽지는 협박에 가깝다.

혹 관장님이 돌변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면, 안심해도 좋다. 윤 감독은 “관장님을 통해 좋은 어른을 꼭 한 명 제대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주인이처럼 과거의 일을 극복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생존자들을 만나보면 항상 옆에 좋은 어른이 있었다”면서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열심히 도장에 나가는 이유는 그렇게 묵묵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관장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는 좋은 어른의 존재가 판타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분명 있어요. 인생의 어떤 순간에 그 어른을 만나지 않았으면 큰일 났겠구나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요. 또 그런 사람을 조명하는게 제 역할이기도 하고요.”

윤가은 감독은 “좋은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판타지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쪽지는 영화의 최대 미스터리다. 누가 보내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대신 반 아이들의 여러 목소리로 내레이션된다. 윤 감독은 “의도적으로 주인이를 탓하는 문장들을 쪽지에 넣었다”면서 “주인이 같은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동시에 주인이의 자문자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것은 너무나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남녀노소 대상을 가리질 않더라고요. 주인이는 그 쪽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거예요. 그러나 이 과정들이 어떤 식으로 기록될 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영화가 끝나면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 의미없이 소모된 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대사가 다 의미가 있고, 곱씹게 된다는 것. 이야기꾼에게 이보다 더 큰 성과가 있을까.

윤 감독은 이러한 감상에 대해 “처음 기승전결이 명확한 구조를 지금의 형태로 바꾸길 참 잘했다”며 안도했다.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주인이의 기승전결을 쌓는데 집중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양새였어요. 많은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아예 해체하고 다시 쓰겠다는 결심을 세웠죠. 기승전결을 신경쓰지 말고, 진짜 삶에 가깝게, 주인이의 일상을 먼저 더 들여다 보자! 고요.”

‘이야기는 만드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 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가르침을 세번째 장편을 만들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도 고백했다.

“어떤 감독도 낭비되는 인물을 그리고 싶지 않을거에요. 이번에 저는 이야기를 끌고가기보다 이야기가 저에게 하는 말을 발견하고 잘 끌려가려고 했어요. 앞으로 더 실재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인물들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여전히 조금은 어렵긴 하지만요.”

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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