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어쩔 수가 없다? HP프린팅코리아, 흑자 기업이 내몬 가장의 생계
권고사직 통보… 거부하면 해고
“삼성 시절부터 자부심으로 일”
인쇄업 쇠퇴 이유라지만 흑자
77명 대상… “정부가 나서야”

21일 정오께 성남시 판교의 HP프린팅코리아(이하 HPPK) 사옥 앞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낮 12시30분. 저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1층 로비로 들어서는 네댓 명의 무리 사이에서는 “그분은 98년도부터 일했다더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같은 시각 HPPK 사옥 옆 인도에는 해고 예정자들이 모여있었다. 인쇄 품질을 다듬으며 양질의 A3 복합기를 개발해온 이들은 오는 31일 회사를 강제로 떠나야 한다. 최근 사측이 일부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하고 거부 시 해고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인쇄 산업의 쇠퇴가 그 이유였지만, 해고 통보 당사자들에게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들렸다. 회사는 최근 3년 연속 흑자(9월24일자 7면 보도)를 냈고 A3 프린터 개발·특허·생산기술은 전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만이 보유한 핵심 산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생업이 걸린 사람들에게 구조조정은 단순한 기업의 경영권 행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4인 가족의 가장으로 수원에서 출퇴근하며 8년간 개발 업무를 맡아온 A(40대)씨는 “10월31일자로 해고되면 11월부터 월급이 안 들어오는 게 제일 무섭다”며 “사측에 이야기할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너무 막막해서 말이 안 나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고 사실을 아내에게만 알렸다는 그는 중학생과 고등학생 자녀에게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HPPK는 삼성전자 프린터사업부가 시초다. 지난 2017년 미국 기업 HP로 매각된 것인데, 1980년대 후반 입사해 현재까지 근무하는 직원도 있다. A씨는 “삼성 시절부터 동료들과 과제를 해결해가며 함께 성과를 내던 그 시간 자체가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버려지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인수 당시 구조조정 우려가 나왔는데 결국 외국계로 바뀌며 현실이 됐다”고 토로했다. 길거리 시위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집회에서는 ‘권고’사직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 해고로 결론나는, 답이 정해진 구조조정 방침이 부당하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앞서 사측은 지난 17일 77명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하며 당사자가 거부할 시 24일 해고, 31일 일괄 퇴직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노조에 전달했다.
김재우 HPPK 노동조합 위원장은 “회사가 추진하는 구조조정은 단순한 인력조정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고 가정의 생계를 무너뜨리는 폭력적인 행위”라며 “삼성전자에서 HP로 매각된 이후 회사를 위해 헌신해 온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답이 해고라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배신이자 모욕”이라고 꼬집었다.


외국계 기업의 무책임한 경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장지화 진보당 공동대표는 “HP는 한국의 연구인력과 기술을 확보해놓고 약속한 R&D 허브 구축은 외면했다”며 “프린터는 폐기처분 할 수 있지만 사람은 쓰다가 버리는 부품이 아니다. 외국 자본이 기술만 쏙 빼먹고 한국 노동자를 해고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당초 해고 대상자는 90여 명이었으나 노조 집회와 국회 대응 과정에서 77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측은 어떤 기준으로 대상자를 선정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 HPPK 측은 “세부 선정 기준은 최대한 공정하게 정했고, 노조 측에도 그 내용을 설명했다”며 “다만 개별 기준이 무엇인지는 외부에 공유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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