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역(逆)베팅 2400만원을 날렸다 “사기꾼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세상&]
심리학자와 ‘사기 프로파일링’ 공저
2000년대 보이스피싱 초기수사 경험
“20년 전 방식 여전…기술 입고 진화”
캄보디아 취업사기 “의심 어려웠을 것”

[헤럴드경제=박준규 기자] 서울경찰청 광역정보팀 소속 이승환 경감(55)의 별명은 한때 ‘보이스피싱 저승사자’였다. 영등포경찰서 지능팀에서 10년을 수사하면서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라는 사기범죄의 등장과 초기 수사를 했다. ‘아들을 납치했다’는 거짓을 앞세운 사기전화를 걸어 부모의 혼을 빼놓고 돈을 가로채는 방식은, 지금 생각하면 다소 허술하단 생각도 든다. 그런데도 보이스피싱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진화했으며 피해자를 낳았다. 이 경감은 2012년 이후부턴 정보경찰의 길을 걷고 있지만 줄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사기피해가 자꾸 의식됐다.
“20년 전 수사했던 보이스피싱 방식의 골자는 아직도 이용되고 있어요. 약간의 기술은 더해졌겠지만 사기를 벌이는 메커니즘은 그대로였죠.”
그가 국립경찰 창설 80주년이 되는 올해 초,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여전히 속이는 이와 속는 사람의 악다구니가 이어지는 판에서 사기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가까이 있는 위험임을 절실히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달콤한 ‘거짓의 말’에 심리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 학문적으로도 짚고 싶었다. 35년지기 친구인 이승철 한국열린사이버대 부동산금융자산학과 특임교수와 의기투합해 ‘사기 프로파일링’(도서출판 밀알)을 출간했다. 심리학-수사 베테랑들의 문제의식을 이승환 경감을 만나 직접 들었다.

이 경감은 올해 초 지인이 ‘스포츠 역(逆)베팅’으로 재테크한단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 프로축구 경기의 스코어를 예상해 돈을 걸고 배당금을 타 내는데 수익이 쏠쏠하단 거였다. 독특한 점은 스포츠토토처럼 합법적 베팅 게임은 정확한 경기 결과를 맞춰야 하는데 역베팅은 실제 결과가 3대 1이었다면 3대 2나, 1대 1로 못맞추는 쪽에 돈을 걸어야 배당받는 것이다.
“구조 자체가 이상했죠. 제가 이건 틀림없이 신종 폰지(Ponzi) 사기 같다고 하면서 걸어둔 원금을 다 찾으라고 조언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투자금을 늘렸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보니 2400만원을 날렸다고 했어요.”
그가 경찰의 말도 듣지 않은 건 사기조직의 교묘한 ‘심리전’ 때문이었다. 그들은 1차, 2차 베팅을 했을 땐 약속대로 배당금을 지급해 줬다. 피해자가 신뢰하도록 만들려는 일종의 초기 투자였던 것. “돈이 들어오네”하면서 반색한 피해자는 돈을 더 끌어다가 게임이 참여한다. 그리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사기 일당.
믿음을 유도해 놓고 뒤통수를 치는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었다. 이 경감은 “초기 투자에서 배당금을 지급하면서 진실편향과 확증편향 같은 사람의 심리적 특성을 자극했던 것”이라며 “더구나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투자한다는 사실까지 곁들여지면 반대되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온라인 사기에 가담해 구금된 한국인들이 1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이날 송환에는 경찰 호송조 190여명이 투입됐다. [연합]](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21/ned/20251021064653872ahse.jpg)
최근 한국인들이 캄보디아에 똬리를 튼 범죄조직에 붙잡혀 각종 사기범죄에 동원된 사실이 알려졌다. 현지에서 범죄에 가담했다가 국내로 송환된 64명 중 58명은 피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해외에서의 고액 알바 일자리 공고를 보고 캄보디아행(行)을 선택했다가 느닷없이 손발이 묶여버린 것으로 보인다. 취업을 빙자한 사기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하는 피의자 처지가 됐다. 이 경감은 “순수하게 취업사기를 당한 청년들은 저마다 희망을 품었던 만큼 합리적 의심을 못했을 수 있다”며 “결과적으론 범죄자가 됐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들이 몸담았던 범죄조직은 이른바 ‘스캠 센터’라고 불리면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 코인투자 사기(투자리딩) 등 온갖 사기범죄를 실행했다. 각 범죄마다 교묘한 시나리오가 준비됐다.
이 경감은 “기초적으로 권위남용과 호의 베풀기 같은 신뢰를 싹트게 하는 수단을 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 경찰, 금감원 직원, 금융사 직원 등으로 속이며 권위를 앞세우는 게 권위남용. 친절과 호의의 말로 호감을 사고 신뢰를 형성하는 작업이 호의 베풀기다. ‘당신은 참 친절하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다’면서 접근하는 로맨스 스캠은 호의 베풀기로 상대를 무장해제하는 사기 방식이다.
“사기치는 범죄자들이 내 말 좀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죠. 인간관계의 여러 핵심 요소들을 활용해서 우리가 스스로 믿게 만드는게 그들입니다. 잘 나고 똑똑한 이들이나 조심성이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있죠 사기범들은 그들의 허점을 찾기 위해 풀타임으로 연구하고 또 연구합니다.”

저자들은 책 서두에선 ‘이 책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거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읽으라고 제안한다. 책 뒷부분엔 아예 ‘속지 않기 위한 지침서’라는 제목으로 30페이지에 걸쳐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와, 단어별 색인을 실었다. ‘전세사기’, ‘심리 조작’, ‘낙관 편향’, ‘권위 편향’ 같은 주요 단어를 중심으로 골라 찾아 읽을 수 있다.
이 경감은 “우리가 사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심리적 배경을 말하고 싶었다. 일상에서 가까이 두고 찾아보는 일종의 지침서가 되길 바랐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사기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고 누구나 당하는 보편적인 위험임을 인정해야 한다. 경찰이 수사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이 범죄 기법과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도 정말 효과적인 방지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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