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70) 문무왕의 유조

신라 30대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성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에도 왜와 당나라 등의 신라를 위협하는 외세 침략에 대한 걱정은 상존하고 있었다. 문무왕은 남산신성을 개축하고, 동궁과 월지를 지어 내적인 안정을 꾀하는 한편 전쟁에 대한 만반의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화전설 1: 왕의 유언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과 외삼촌 김유신 장군을 따라 어려서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노력해 삼국통일을 이룩한 군왕으로 신라 천년을 두고 가장 훌륭한 성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왜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남산신성을 개축하고, 동궁과 월지를 짓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당부하며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될 수 있게 화장해 동해에 장례를 치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문무왕의 유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조금씩 다르게 전하고 있다. 그 뜻을 간추려 기술한다.
"과인은 나라의 운이 어지럽고 전란이 잦은 시대에 태어나,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서쪽의 적을 물리치고 북쪽의 위협을 정복하였으며, 반역을 일으킨 자를 다스리고, 협력한 자를 포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웠다. 이로써 조상의 뜻을 위로하고, 아비와 아들의 오랜 한을 풀었다.

나는 부끄럽지 않게 다스렸고, 신하나 백성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정사에 힘쓰며 병이 깊어져 이제 목숨이 다함을 안다. 태자는 오랫동안 학문과 덕을 닦아 왕위를 이을 준비가 돼 있다. 모든 신하는 조상의 혼을 공경히 보내되, 산 임금을 받드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제사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으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곧 왕위를 이어라.

◆흔적: 문무왕릉, 문무왕탑지
신라 천년의 터 경주에는 삼국통일의 주역 문무왕에 대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왕의 죽음에 대한 흔적 또한 사천왕사지의 귀부, 낭산의 탑지, 동해의 문무왕릉 등이 대표적인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문무대왕릉은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경주시 문무대왕면의 동해 해변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바다 위 바위섬인 대왕암이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고, 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죽은 후 용이 돼 바다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된 후 동해에 수장됐고, 대왕암은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왕암 중심에는 길이 3.6m, 폭 2.5m, 깊이 0.9m 정도의 수혈이 조성돼 있는데, 이는 문무왕의 유해가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다.

-문무왕탑지는 경주 낭산 자락에 위치한 석탑 유적으로, 일반적으로 능지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린다. 이곳은 문무왕의 화장지 또는 사리탑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인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유물과 숯 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화장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지는 2층의 방형 가옥 형태로 조성돼 있다. 1층 기단부에 12지신상이 사면 호석으로 설치돼 있지만 크기도 다르고, 무복을 입은 호석과 문복을 입고 있는 호석 등으로 형식이 달라 다른 곳에서 가져와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의 시신은 화장해 동해에 수장됐지만, 그 유골 일부나 화장재가 이곳에 봉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방형으로 복원된 탑지는 주변에 많이 남아 있는 연화문 석재 등으로 보아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을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다수설이다.

◆스토리텔링: 용이 된 왕 바다를 지키다
통일신라의 태평성대가 이어지던 어느 해, 왕궁의 달은 유난히 붉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그 달빛 아래, 문무왕은 대비와 함께 깊은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병이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왕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대비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흠돌이... 그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소. 내가 눈을 감는 날, 틀림없이 칼을 빼들 것이오."
김흠돌. 화랑의 풍월주를 지낸 신라 대신 가운데도 많은 무리들이 따르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왕손이다. 또한 문무왕의 왕비가 된 왕후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왕의 연적이기도 하다. 청년시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은 권력의 정점을 노리며 때를 엿보는 야심가이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 흠돌이 움직이면... 피를 흘리지 말고, 그림자처럼 없애라. 백성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어 "그대가 이젠 실질적인 왕실을 지키는 주인이다. 왕에게도 드러나지 않게 결사대는 음지에서 신라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정도를 걸어가는 불사신이 되기를 바란다."
문무왕은 전쟁 없는 나라를 꿈꿨다.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그는 백성들에게 평화를 약속했다. 칼을 땅에 묻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신라는 전쟁이 없다." 그러나 왕의 등 뒤에는 그림자 군대, 비밀결사대가 24시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그날 밤, 왕은 아들에게 남길 마지막 말을 대비에게 전했다. "내가 죽거든, 산에 묻지 말라. 동해의 물결 속에 나를 던지라. 용이 돼 신라를 범하려는 왜국의 배를 삼키리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무왕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궁궐은 침묵했고, 대신들은 애도를 표했으며, 백성들은 평화의 왕을 위해 흙을 움켜쥐고 통곡했다. 그러나 신문왕과 비밀결사대는 조용히 동해로 향했다. 검은 배 한 척이, 밀물에 밀려 동해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그 안에는 왕의 시신과 함께, 수많은 비밀이 실려 있었다.
문무왕이 잠든 그날 밤, 바다는 요동쳤다. 갑자기 나타난 소용돌이 속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푸른 비늘의 용이 목격됐다. 용은 울부짖는 듯, 승천하는 듯 동해를 가로지르며 울었다. 그로부터 왜의 해적선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뱃머리를 신라 쪽으로 돌릴 생각을 접었다.
문무왕 사후 왕이 지으려던 응남전을 신문왕은 감은사로 고쳐 지었다. 감은사의 툇마루 아래를 깊게 파 바닷물이 드나들게 했다. 그것은 용이 된 부친, 문무대왕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였다. 감은사는 신라의 심장이 됐고, 그 아래서 용은 나라를 지키고 있다 믿었다.
한편, 왕의 명을 받은 결사대는 아무도 모르게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했다. 군대가 움직이기 전, 흠돌은 이미 실종됐다. 아무도 그를 본 이가 없었고, 그 어떤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백성들은 단지 '역모가 미연에 방지됐다'는 조정의 발표만 들었을 뿐이었다.
역사에는 남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있었다. 문무왕은 살아서 나라를 지켰고, 죽어서 바다를 지켰다. 그는 왕이었고, 신이었고, 신라를 품은 푸른 용이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문무왕은 백성의 어버이였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