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서 송환 64명 대부분, 보이스피싱·로맨스 스캠 등 가담
정부, 뒤늦게 금융 제재 추진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 등 사기 범죄에 가담했다가 이민 당국에 구금된 한국인 64명이 18일 새벽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송환됐다. 이들은 이른바 ‘웬치(wench)’라고 불리는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중국 조직의 지시에 따라 보이스피싱이나 로맨스 스캠(사기) 등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59명은 캄보디아 당국의 사기 단지 검거 작전 때 붙잡혔고, 나머지 5명은 현지 경찰에 자진 신고해 이번 송환에 포함됐다.
이들을 태우고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테초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 KE9690편은 5시간 20분 만인 이날 오전 8시 35분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들은 전세기에 타자마자 기내에서 한국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한국에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신분”이라며 “국적법상 국적기 내부도 대한민국 영토이기 때문에 체포 영장을 집행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은 이들을 충남경찰청과 경기북부경찰청 등 전국 각지로 분산해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이들이 캄보디아 범죄 조직에 납치·감금된 상태에서 협박을 받아 범죄에 가담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범행에 가담했는지 등을 조사 중이다. 경찰은 이들의 혐의 여부와 그 경중을 가려 구속 영장 신청 대상을 선별해 영장을 신청한 뒤 결과를 20일 중 발표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한국인 등 외국인 납치·감금·살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캄보디아의 범죄 조직 ‘프린스 그룹’과 ‘후이원 그룹’ 등에 대한 금융 제재 작업에 돌입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9일 “관계 기관 간 협의를 마치는 대로 이 조직들에 대한 금융 제재에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캄보디아 범죄 관련자를 금융 거래 제한 대상자로 지정하고, 기획재정부가 외환 거래를 금지하면 범죄 조직의 자금이 동결된다.

◇송환자들, 리딩방 사기·대포통장 연루… 보이스피싱 대본 쓰기도
18일 오전 9시 54분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입국장 문이 열리자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구금됐던 한국인 64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20·30대 남성이었다. 이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돈을 뜯어내면서도, 동시에 캄보디아 범죄 조직원들에게 감금·폭행을 당했다. 마스크와 모자, 후드티 등으로 얼굴을 가렸고 일부는 팔 곳곳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을 압송한 경찰들은 양옆에서 팔짱을 끼고 도주를 막았다. 이 과정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욕설과 고성을 지르며 이들에게 접근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입국길 피의자들은 취재진 질문에 묵묵부답했고 고개를 숙인 채 경찰에 이끌려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호송 차량 23대에 나뉘어 타고 전국 경찰서로 분산 수용됐다.

이날 송환된 64명 가운데 충남경찰청에 45명, 경기북부경찰청에 15명이 배정됐다. 두 경찰청 관할 경찰서에 보이스피싱 피해 고소장 접수가 몰려 캄보디아 조직들에 대한 수사가 가장 많이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충남·경기북부 경찰청은 올해 들어 보이스피싱 집중 수사 관서로 지정됐다. 경찰 관계자는 “전담 수사 경험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두 경찰청에서 수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나머지 피의자들은 서울 서대문경찰서, 경기 김포경찰서, 대전경찰청, 강원 원주경찰서 등에서 수사받고 있다.
충남경찰청으로 이송된 피의자 상당수는 ‘불법 투자 리딩방’ 사기에 가담했다고 한다. 투자 리딩방은 카카오톡·텔레그램 등에서 특정 종목을 추천하고 매수·매도 타이밍을 안내해 투자를 유도하는 곳이다. 경기경찰청에 이송된 이들 상당수는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로맨스 스캠 등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로맨스 스캠은 소셜미디어나 데이팅 앱을 통해 달콤한 말로 접근한 뒤 투자를 권유해 돈을 가로채는 신종 사기다. 외국인으로 위장하고 한국에 여행을 간다며 접근해 환심을 산 뒤 결혼을 약속하면서 가짜 코인 거래소 등을 통해 코인 투자를 요구하고 이를 가로채는 식이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상당수는 보이스피싱이나 로맨스 스캠 외에도 ‘장주(통장 명의자)’ 역할을 한 혐의도 받는다”고 했다. 캄보디아 범죄 조직들은 한국에서 이른바 ‘장집(대포 통장 모집책)’을 통해 자금 세탁을 위한 ‘장주’를 모집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서 가로챈 범죄 수익금을 세탁하기 위해 한국 청년 통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송환된 피의자 대다수는 MZ세대다. 이들은 범죄 단지에 감금돼 보이스피싱, 불법 투자 사기, 로맨스 스캠 등 다양한 범죄에 투입됐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폭행을 당했다. 캄보디아에서 강제 노동과 폭력에 시달렸지만 이들이 한국 법원 재판에 회부되면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크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 이익 규모와 상관없이 범죄 단체 조직죄 등이 적용돼 중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정부는 캄보디아 범죄 조직에 대한 금융 제재에 돌입했다. 유력 제재 대상으로 꼽히는 기관은 프린스 그룹이다. 겉으로는 부동산·카지노·금융 사업체라고 광고하지만 캄보디아 곳곳에 지어진 범죄 단지에서 사이버 범죄와 인신매매를 벌인 혐의로 지난 14일 미국·영국 정부의 합동 제재를 받았다. 정부 관계자는 “캄보디아 내 범죄 단체가 매우 많아, 제재 대상 선정 기준을 외교부에서 검토한 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에 통보하면 본격적인 제재가 이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한편, 캄보디아에서 범죄 조직에 납치돼 숨진 한국인 대학생 A(22)씨 부검이 20일 현지에서 국과수 법의관 주도로 캄보디아 당국과 공동으로 진행된다. A씨는 지난 7월 17일 출국한 뒤 3주 만인 8월 8일 캄포트주 보코산 인근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을 위해 국과수 부검의와 담당 수사관 등 7명이 19일 저녁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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