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5년만에 깨어난 김세영의 '붉은바지 마법'

[골프한국] 김세영(32)만큼 드라마틱한 선수도 찾기 힘들 것이다. LPGA투어에서 뛰기 시작한 2015년부터 그가 거둔 12번의 우승은 예외 없이 극적이었다.
2015년 4월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오하우 코올리나GC에서 열린 롯데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에서 김세영이 펼친 퍼포먼스는 드라마 또는 기적이란 단어로도 부족한 듯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불가사의한 스포츠'라는 원망 섞인 찬탄을 듣는 골프이지만 기적 같은 샷이나 드라마 같은 라운드는 흔치 않다. 일반적으로는 견실한 기량에 평정심을 잘 유지하면서 행운까지 따르는 선수가 우승컵을 차지할 확률이 높고 아주 드물게 결정적인 순간에 기적 같은 샷을 만들어내 승리를 거머쥐는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 대회에서 보인 김세영의 경기는 골프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한 대회에서 한 번 정도 나올까 말까 한 기적이 잇달아 두 번이나 한 선수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기적이 겹쳐 일어나지 않았다면 롯데 챔피언십 우승컵은 박인비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김세영과 박인비는 11언더파 공동선두로 18번 홀을 맞았으나 김세영의 티샷이 워터 해저드로 빠지면서 사실상 우승의 여신은 박인비 편에 서는 듯했다. 박인비는 파온만 하면 버디를 노릴 수 있고 실패해도 파 세이브를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반해 김세영은 반드시 핀 가까이 붙여 원퍼트로 홀인 시켜야 연장전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인비는 예상대로 투온에 성공했고 1벌타를 받고 세 번째 샷을 날린 김세영의 볼은 온 그린에 실패, 보기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박인비의 버디 퍼팅은 빗나갔지만 파 세이브는 확정적이었다. 김세영이 그린 옆에서의 칩샷을 바로 홀인 시키지 않는 한 우승은 박인비의 것이었다.
이 순간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김세영의 클럽을 떠난 볼은 그린에 떨어져 구르더니 바로 깃대가 꽂힌 홀 안으로 사라졌다. 김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클럽을 내던지고 하늘로 향해 고개를 젖히고 팔을 치켜올렸다.
벼랑 끝에 매달렸다 살아나 연장전에 돌입한 김세영은 바로 직전의 칩인샷보다 더 기적적인 샷을 만들어냈다. 8번 아이언으로 날린 볼이 그린 바깥 에지에 떨어져 튀면서 그린으로 올라오더니 한 번 튄 뒤 바로 홀로 꽂힌 것이다. 박인비의 두 번째 샷이 온그린 됐으나 김세영의 샷이글로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났다. 김세영이 하늘과 갤러리, 카메라를 향해 손바닥으로 키스세례를 날릴 만했다. 이 순간 김세영은 미국은 물론 세계의 골프팬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은 각인을 남겼다.
이후 김세영은 장하나와 함께 LPGA투어에 '풀무'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출전한 대회와 빠진 대회의 열기가 확연히 구별될 정도였다.
데뷔 해에 3승을 올리고 이듬해 3월 JTBC 파운더스컵 대회에서 4라운드 내내 신들린 샷으로 스웨덴의 아니카 소렌스탐이 2001년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 대회에서 세운 LPGA 72홀 최저타 27언더파와 타이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2016년 6월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 블라이드필드CC에서 펼쳐진 LPGA투어 마이어클래식 마지막 라운드에서 김세영은 거친 황소를 제압하는 투우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김세영은 매우 거북한 상대들을 만났다. 렉시 톰슨은 미국이 내세우는 대표선수로 LPGA투어 최고의 장타자다. 공동선두에 한 타 뒤져 챔피언조에 편성된 전인지는 일찌감치 한국 일본 미국의 메이저대회를 석권한 스타다. 챔피언조 바로 앞 조에 배정된 스페인의 카를로타 시간다 역시 언제라도 우승이 가능한 선수다. 또래의 청년을 연상케 하는 강인한 체격에 걸음걸이도 '어깨'의 그것처럼 터프하고 렉시 톰슨과 비슷한 장타자다.
김세영은 마치 거친 두 마리의 황소와 대결하는 투우사가 되어야 했다. 우람한 체격과 힘으로 길게 볼을 날리며 저돌적으로 덤비는 렉시 톰슨과 카를로타 시간다는 영락없이 투우장의 황소다. 김세영이 노련한 투우사가 되지 않고선 승리를 쟁취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세영은 뛰어난 토레로(torero, 투우사)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투우사라 해도 황소에게 작살을 던지는 반데리에로(banderillero)나 창을 던지는 피카도르(picador) 같은 조연 투우사가 아닌 '투우사의 꽃' 마타도어(matador)로서 팬들을 열광시켰다. 마지막 라운드 18홀을 마칠 때까지 카를로타 시간다가 연장전에 대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우승한 줄 착각했을 정도로 경기에 몰입했다.
투우사의 붉은 망토를 떠올리게 하는 마법의 붉은 바지를 입은 김세영은 비장의 예리한 단도로 황소 카를로타 시간다를 무릎 꿇리는 드라마로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김세영은 데뷔 이후 2020년 메이저인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 등 매년 우승을 보탰다. 통산 12승이다. 2020년엔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2020년 11월 펠리칸 위민스 챔피언십 이후 우승을 맛보지 못했다. 상금 순위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도 우승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에게 '역전의 여왕'이란 칭호를 붙게 한 '붉은 바지의 마력'도 효험이 없었다.
5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김세영의 '붉은 바지의 마력'이 고향(전남 영암) 인근 해남에서 깨어났다. 김세영은 19일 해남 파인비치골프링크스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나흘 내내 선두를 지키며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일궈냈다. 최종 합계 24언더파 264타. 2위 하타오카 나사를 4타 차이로 제쳤다. LPGA투어 통산 13째다. 이로써 올 시즌 한국 선수들의 LPGA투어 우승은 6승으로 일본(5승)에 1승 앞서게 됐다.
5년 동안 잠자고 있던 '붉은 바지의 마법'을 깨운 것은 고향 팬들의 뜨거운 응원의 힘이었다. 목표 남쪽의 한적한 해안가라 접근이 쉽지 않은데도 매일 1만 여명의 갤러리들이 모였고 마지막 날에서 3만 여명이 몰렸다.
고향의 기운이 잠자고 있던 김세영의 붉은 바지의 마법을 깨워 결국 '역전의 여왕'의 귀환을 이뤄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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