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무등산 산마을학교 이서분교장(중) [남도 학교기행]

선명완 2025. 10. 1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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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무등산 산마을학교 이서분교장(중) [남도 학교기행]
무등산 규봉암을 배경으로 자리한 화순초등학교 이서분교. 이서면 유일의 공교육 기관이다.

#환경, 성장의 촉매

허기에 맞춰 음식이 나오면 미각을 세워 먹는 데 집중해야 할까, 대화를 곁들여 느긋이 먹어야 할까. 이런 게 궁금할 때가 있다. 가을에 대한 양가감정도 그렇다. 서늘한 기운 만끽하며 사박사박 낙엽 밟는 답홍(踏紅)놀이 하며 쏘다녀야 하나, 둔부에 진물 나도록 철야 독서, 결사 독서를 해야 하나.

알아서 쓴 글과 느껴서 쓴 글은 차이가 있다. 지식과 정보의 양이 쌓이게 되면 풀어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이때의 글은 대체로 사변적이다. 문장이 길어지고 호흡이 불편해지곤 한다. 타인의 지식을 가져온 탓이다. 반면, 느낌을 앞세워 쓴 글은 노랫말처럼 운율이 내재되어 있다. 글쓴이의 호흡이 느껴진다. 흥이 살아 있다. 절로 가속이 붙는다. 자평하자면, 알다시피, 나의 글은 순수 자작, 느낌의 글에는 못 미친다.

너스레 이야기이니 심중에 오래 두지 마시라. 산자락 이서에 교육의 장을 펴야 하나, 아이들을 인근 도회지로 보내 문명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하나. 그 언저리에서 잠시 토막 생각하다가 닿은 샛길 사유였다. 사람이 들썩거리며 모이는 장터교육이 성장 촉매인지, 벽계수가 흐르는 산골 환경이 인성교육에 마땅한지는 '맹모삼천'을 실천했다는 그 교육철학자를 불러 다시 질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초등교육, "6년은 너무 길다!" 그러니까 2년 혹은 3년 주기로 성장 단계에 맞춰 교육 환경에 격변성을 제공해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현재 산골 이서의 유일한 교육기관은 이서초등학교, 정확히는 화순초등학교 이서분교이다. 뜸을 충분히 들였으니 이제 그 '이서 교육'을 얘기해 볼 참이다.
 
이서 사립학교 개교 소식을 전하는 기사(매일신보 1923.3.13.)

#이서의 봄, 근대교육의 시작

조선총독부 기관지 노릇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의 후신 매일신보(이하 기사는 매일신보)는 이서에 처음으로 근대학교가 개교했다는 기사(1923.3.13.)를 실었다. 최초의 학교는 사립학교였다. '이서 사교 개교(二西 私校 開校)', 기사에는 "대정 8년(1919년)부터 발기되어 매 호당 2원의 출연금으로써 겨우 기공하였으나 경비의 부담으로 최근까지 4년이 흐르도록 준공치 못하여 유감을 금치 못하였다"며, 작년(1922년) 가을부터 면장 하응(河應) 씨 등 면내 유지들의 각성으로 공사를 완료하고, 늦게나마 각성하고 분개하여 (1923년)3월 5일부터 학교를 열었다는 것이다.

출연금이 5백 원에 달하였으며, 추가될 의연금도 3천여 원에 달할 것이어서 장래가 극히 유망하다고 했다. 1920년대 소규모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하는 비용이 약 3천 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공식적인 이서 교육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기사에 등장한 인물, 학교 건립을 주도한 면장 '하응' 씨는 1921년~1925년 이서면장을 지낸 하응락(河應洛, 1897~1949)일 것이다. 그는 면장으로 재임하던 초기에 '모함'을 당하기도 하였다. 면장직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직면한 것이다. '면장을 모함하여 내어놓으라고 협박(1922.9.28.)'이라는 기사를 보면, 대정 9년(1921년)부터 면장에 취임했던 그는 "행정상 하등의 결점이 없는데 어떠한 불량한 자가 면장을 내놓으라는 협박장을 수차례 배달"시켰으며, 경찰서에서 엄밀히 조사를 한 결과 면장을 하고 싶어하던 자의 소행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하응락이 주도한 이 사립학교가 어디에 건립되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1926년 8월 11일 "학교장이 생도들에게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각 면, 주재소에 익명의 우편물이 전달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해까지 학교는 유지되었다고 본다.

이 사건은 파급이 커서 "선생 배척, 동행 휴학"으로 고조될 우려가 있었다. 한편, 1925년 9월 19일에는 면장 김태현(金台鉉)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담은 기사도 보인다. 김태현은 하응락 후임으로 그해 봄 면장에 임용되었는데, 야사리 교량 설치 문제로 각호당 2인씩 울역 징수, 농번기철 무등산 풀베기 작업에 따른 임금(1일 50전) 미지급, 상습 도박 등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건달 면장'이라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당시 국가적 사업이었던 국세조사(國勢調査) 위원이기도 했던 각 마을의 구장(區長)을 중심으로 방석보장(防石市) 또는 학교 운동장에서 면민 규탄 대회를 준비한 것으로 보아 학교는 방석보장(방석부장, 방석굴장, 석보시)이 위치한, 대체로 평지인 석보마을, 혹은 동쪽으로 약간 산비탈 마을인 전도마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창랑천과 영신천이 합류한 퇴적 지형인 두 마을은 모두 수몰되고 말았지만, 당시에는 도석리 석보마을과 전도마을 일대가 이서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도석리'라는 지명은 전도마을의 '도'와 석보마을의 '석'을 합한 이름이다. 이 학교가 공립으로 전환되었을 거라는 추정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이서초등학교의 모태로 알려진 이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것은 이듬해 1927년이었다. 5월에 인가가 되어 6월 7일에 개교하였는데, 그 장소는 오늘날 이서 커뮤니티센터가 있는 야사리 204번지 어디쯤이었다. 이후에는 다른 보통학교(초등학교) 경우처럼 30년대 심상학교, 41년 국민학교를 거처, 1996년 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1995년 8월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시민단체의 요청을 수용하면서 1996년 3월 1일을 기하여 전국 5,770여 초등학교에서 교명 현판 교체식을 했다. 관련하여 '유치원'이라는 일제 잔재 용어도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 정원'을 뜻하는 독일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일본식으로 변역한 '요치엔(幼稚園)'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다. 그것도 공교육의 첫 단계 현장에서. 일제 잔재 청산은 왜 이렇게도 더디고 어려울까. 일부에서 제시한 '유아 학교'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서면 도석리 방석부 5일장 옛모습

#도석리와 야사리

이서 교육은 도석리와 야사리 시대로 대별된다. 야사리에서 37년 남짓 운영되었던 이서국민학교는 1962년 도석리 591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도석리 중심 석보마을에서 북쪽 방아재로 가는 입구에 자리했다. 야사리 기존 건물이 낡았기도 했지만 도석리 석보마을·전도마을 일대는 창랑리 또는 백아면으로 가는 주 교통로였으며 영신천과 창랑천이 이룬 퇴적지에 제법 크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4일, 9일에 섰던 방석보 5일장(방석부장) 장터 석보마을은 자체 인구만으로도 140명 정도였지만 인근에서 많은 장꾼들이 건너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우시장, 마시장은 물론 마포전과 성냥간에다가 소금창고와 연초 하치장까지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찰서 지서와 농촌지도소 지소, 이서단위농협까지 있었으니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야사리 이서국민학교 터에는 5년 후 이서중앙국민학교가 개교하였다. 하지만 학생수 감소로 1983년 이서국민학교 야사분교장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수몰 이전 이서면의 중심지 도석리 석보마을.

이후 이서면에 커다란 지형 변화와 함께 주민 생활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1984년 동복호 3차 확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중심지였던 도석리와 창랑리 주변 일대가 수몰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와 행정의 중심이 다시 야사리로 옮기면서 1985년부터 야사분교장을 통폐합하여 그 자리에 이서국민학교와 도석리로부터 함께 이전한 신농중학교가 공립으로 전환되어 동면중학교 신농분교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수몰로 인한 아픈 이주의 역사였다. 수몰지역 주민들은 야사로 이주하기보다 고향을 떠났다. 이후 학령 인구가 급감하여 1986년 3월 성산분교장(이서면 서리) 편입에 이어 1991년 통폐합, 그리고 1992년 3월 1일 현 위치인 무등산 자락 영평리 규봉로 도로 옆에 있던 이서북국민학교로 이전 두 학교가 통합되면서 이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관내 4개 학교를 통합하였으나 산골마을 학령인구 소멸은 피할 수 없었다. 1996년 이서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가 2011년 3월 화순초등학교로 편입되어 이서분교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서분교에서는 현재 교감을 포함한 4명의 교원과 24명의 학생들이 이서면 영평리 무등산 규봉암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학년에는 학생이 없으며, 봄날 새싹보다 더 귀한 1학년 학생은 단 2명이다. 현재도 복식학급을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지만, 1·2학년 학생이 모두 2명, 이 마저도 무너지면 이서교육은 폐업이다. 끝이 나게 된다.

한편, 야사리 커뮤니티센터에 있던 동면중학교 이서분교(신농분교)는 2007년까지 유지되었다가 2008년부터는 학생들이 주로 화순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근대 초등교육의 시작은 1895년 소학교령이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최초 관립 소학교인 한성사범학교부설소학교에서 비롯된 초등교육은 보통학교(20년대)-심상학교(30년대)-국민학교(40년대)를 거쳐 1996년 오늘날 명칭인 초등학교로 변천되었다. 이렇게도 교명이 자주 바뀐 역사를 지닌 다른 나라의 사례가 있을까마는, 이는 조선땅에서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근대와 일제 강점기 역사가 교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이서에서는 수몰의 아픔까지 더해져 작은 디아스포라(Diaspora), 교육적 난민 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
 
이서고등공민학교를 일으킨 규운 하성래(<교회와 역사> 표지. 2014년 1~2월호)

#이서 중등교육의 선구자 하성래

고등공민교육은 초등교육을 마친 이후 중등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고자 마련된 제도이다. 내 누이가 대상자이기도 했던, '공민교육'이라는 참 서늘한 기억, 교육에 대한 그 억척스러움은 달리 논의하겠다.

주로 직장 또는 지역 사회와 연계하여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해방 후 1948년 미군정청에서 고등공민학교 규정을 제정한 것을 계기로 설치되었다. 준교육 기관이며, 따라서 주로 사립으로 운영되었는데, 1960년대부터 시설을 갖추어 정규 교육기관으로 전환되거나 폐지되었지만 '초·중등교육법' 제44조에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특히 1985년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면서 급감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하남시 동성학교(학생수 약 40명)를 비롯 한 손으로 꼽을 만큼 학교가 실재하고 있다.

야사리가 태생지인 규운 하성래(圭雲 河聲來, 1935~ )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서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사범병설중학교,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한 후 그는 1958년~1963년까지 곧장 조선대부속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어 천주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겠지만, 1963~1964년 도석리 71번지 내에 이서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20대 후반의 젊은 교장이었다. 이 학교는 2년 후 인근 담양 남면 구성고등공민학교와 통폐합되어 2년 후인 1966년 최병채와 장두석이 설립한 신농농업기술학교의 근간이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 가을 소나기 같은 활동이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이서 중등교육의 밀알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뜻을 기리어 기록하고 싶었다. 야사리에서 '이서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학(76세) 씨를 비롯한 지역의 노년층들은 그의 활동상을 기억하고 있다. 이후 그는 광주 살레시오고, 서울의 대동상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고려대에서 박사학위(『천주가사 연구』)를 취득하여 명지대, 고려대, 카톨릭대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국문학과 교회사를 연계 연구하여 한국의 전통 문학 갈래인 가사(歌辭) 작품 중에서 천주교 사상과 밀접성이 있는 내용을 발굴하여 '천주가사'라 이름하고, 최근까지 독특하고 독보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가 '천주가사의 백미'라고 일컫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2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961) 신부의 '사향가(思鄕歌)'를 음미해 보고 싶다.

야사리 규남박물관의 주인이자 호남을 대표했던 실학자인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4)의 6대손으로서 학문적 성정을 이어받은 듯하다. 그의 근황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고스란히 아흔이다. 성령과 함께 말년에도 일상이 평화로우시길! 나머지 이서교육 이야기는 <하>편에 이어가겠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