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라는 약을 먹든 바르든 뿌리든… [.txt]
일상의 치유 효과 담은 여러 나라 속담
시간 지난다고 슬픔 잊히진 않겠지만…
시간을 달리다보면 괴로움은 잦아들 것

큰 슬픔을 겪은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가운데 ‘세월이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시간이 약’이라고도 일컫는데 아무리 가슴 아프고 속에 맺혔던 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연히 잊게 된다는 말이다. 환언하자면 ‘망각이 약’에도 가깝다. 하지만 사전의 풀이가 왕왕 그럴 수밖에 없듯이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않는다. 슬프거나 괴롭거나 서럽거나 억울한 일은 잊어서 좋은 것도 있으나, 사랑하는 이를 멀리 떠나보낸 상실감은 억지로 잊는다면 혹은 정말로 잊힌다면 오히려 더 슬플 수도 있다. 망자를 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참 야속하지만 지금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므로 다시 일상을 꾸리며 현실에 새로 적응하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영어도 ‘Time is a great healer’(시간은 훌륭한 치료자)처럼 비슷한 속담이 있는데 ‘Time heals all wounds’(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를 가장 많이 쓴다. 다른 언어 속담들도 ‘약’보다는 ‘의사’나 ‘상처를 치유하다’의 의미가 대부분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기원전 342~290년)의 ‘πάντων ἰατρὸς τῶν ἀναγκαίων κακῶν χρόνος ἐστίν’(시간은 모든 불가피한 나쁜 일의 의사다=궂은일은 피할 수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 낫는다: 판톤 이아트로스 톤 아낭카이온 카콘 크로노스 에스틴)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고, 보편적인 지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속담에 ‘약’을 주로 쓰는 언어는 한국어 외에 튀르키예어 ‘Zaman her şeyin ilacıdır’(시간은 모든 것의 약이다: 자만 헤르 셰인 일라즈드르) 말고는 드물다. ‘약’의 주된 쓰임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영어는 ‘Movement is medicine’(운동이 약이다) 같은 건강 관련 표어가 있는데, 주어에 laughter(웃음), sleep(잠), food(음식), music(음악) 등도 들어간다. 즉 사람이 움직이든, 웃든, 잘 먹든 능동적인 행위로 신체나 정신 건강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약’이다. 그래서 이 경우 한국어는 ‘밥이/잠이 보약’처럼 ‘보약’도 흔히 쓴다.
이와 달리 세월이나 시간은 사람의 행위나 개입과 무관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행위자로 빗댄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의 언어가 더 많다. 영어 ‘Time is the best medicine’(시간은 최고의 약)이 어느 정도는 통해도 별로 많이 쓰지는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슬픔 속에서 계속 허우적댄다면 정신 건강에 나쁜 일이기는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보건이나 건강 표어가 아니고 마음의 치유에 방점을 둔다.
속담이나 격언, 표어는 자주 번역되며 세계 여러 언어와 섞이기 때문에 딱 한 언어에만 있는 경우는 적은 편이고, 자생한 것인지 아닌지 출처가 어디인지 판가름하기도 그리 쉽지 않다. 인도네시아어 ‘Waktu adalah obat’(시간이 약이다: 왁투 아달라 오밧), 중국어 ‘時間就是良藥’(시간은 좋은 약이다: 스젠주스량야오) 등은 21세기부터 주로 보이는 표현이라서 어쩌면 한국어의 영향도 있을 법하다. 일본어 ‘日にち薬’(나날이 약: 히니치구스리)는 간사이 지방에서 주로 쓴다. ‘세월이 약’이라는 표현이 꼭 한국어에 독특하며 이것이 다른 언어로 번역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한국어의 특징이 잘 배어 있다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사실이다.

한국어는 ‘나이’도 먹고 ‘약’도 먹는다. ‘약’은 ‘먹다’(한국어, 중국어, 타이어, 힌디어), ‘마시다’(몽골어, 일본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들다/잡다/취하다(take)’(영어, 러시아어, 튀르키예어, 핀란드어)를 쓰는 언어로 크게 나뉜다. 반면에 ‘나이 먹다’는 좀 거친 표현인 일본어 年を食う(도시오쿠우) 말고는 그런 식으로 나타내는 언어가 매우 드물다. 물론 ‘세월’과 ‘나이’는 동의어가 아니고 이 속담에 나오는 ‘약’도 꼭 내복약이라기보다는 바르는 연고나 고약으로 볼 수도 있다. 스페인어 ‘El tiempo cura al enfermo, que no el ungüento’(아픈 사람은 연고가 아니라 시간이 치유한다: 엘 티엠포 쿠라 알 엔페르모, 케 노 엘 웅궨토)는 연고(ungüento)라는 말도 쓴다. 영어나 딴 언어에서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인 것과 달리 한국어는 세월을 객체로 보고 약처럼 먹는다고 한다면 좀 과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의 풍화에 슬픔도 기쁨도 차츰차츰 깎여나가는 덤덤한 세상의 이치를 담은 말일 것이다.
마음의 아픔이나 슬픔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오래 짙게 계속된다면 불안, 우울, 고립감, 불면, 면역 약화 등 몸과 마음에 모두 부담을 주며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어 ‘약’은 ‘모기약’처럼 해로운 동식물을 없애는 데 쓰는 물질도 일컫는데, 세월이라는 약을 뿌려서 이것들을 퇴치한다고 빗댈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치약’이나 ‘구두약’처럼 닦거나 윤기를 내는 물질도 ‘약’을 쓴다. 타이어 ยาสีฟัน(이 닦는 약: 야시판), ยาขัดรองเท้า(구두 닦는 약: 야캇롱타오), 스와힐리어 dawa ya meno(치약: 다와 야 메노), dawa ya viatu(구두약: 다와 야 비아투)가 한국어와 비슷하다. 세월이 슬픔의 눈물을 닦아준다면 아픔을 딛고 도리어 반짝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세월이 약일지언정 만병통치약은 아니리라. 2023년 개봉한 코미디 드라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맞받아치는 주인공의 대사 “Maybe it can be a Band-Aid”(반창고는 될 수 있겠지)가 나온다. 하지만 반창고가 별것 아닌 듯해도 붙일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세월이라는 약을 먹든, 바르든, 뿌리든, 닦든, 붙이든 하면서 시간 속을 달리다 보면 애끓는 비애가 있었다는 기억은 가슴에 묻고 갈지라도 괴로움은 잦아들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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