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부모도 골목을 헤맨다 [경계의 사람들]

샌프란시스코·김인정 2025. 10. 1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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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해외 입양은 사실상 국가가 묵인한 인신매매라는 비난을 받았다. 재닌과 제넷, 경숙의 존재가 그 증거다. 한국 정부를 향해 질문하는 이들은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엄마품 동산’은 2025년 6월 개장했다. 부지 내 기억의 벽에는 해외 입양인 이름표 700여 개가 걸려 있다. ⓒ시사IN 이명익

쌍둥이의 얼굴은 거울을 보듯 닮았지만, 가족 중 누구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쌍둥이는 양어머니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아기 침대에서 서로만 알아듣는 옹알이로 대화를 하다가도 양어머니가 오면 뚝 멈추고 숨죽이곤 했다. 그 이상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양아버지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기 직전이었던 열두 살의 어느 오후, 늘 어수선한 비좁은 방을 청소하며 재닌(Janine)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렇게나 희미한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쌍둥이 자매 제넷(Jenette)은 더러운 먼지를 싹싹 쓸어모아 재닌이 들고 있는 큰 봉지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은 그들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제넷은 문제를 잊거나 털어버리는 편이었다. 재닌은 기억을 두고두고 속에 쌓았다. 그런데도 1970년대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남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자매는 미국 시애틀 외곽 372㎡(약 112평) 크기의 숲속 주택에 살았다. 독실한 장로교인 부모님과 두 오빠가 있었다. 한국에서 입양된 쌍둥이 자매에게 질문 없이 주어진 삶이었다. 둘 중 누가 언니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입양 서류에는 서울의 한 골목에서 발견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그 이상은 물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입양된 고아는 구원받은 거라고들 했으니까. 자매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즐기고, 마이클 잭슨과 롤러스케이트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미국 소녀로 자랐다. 물론 몇 가지 비밀이 있었다. 양어머니에겐 물건을 쌓아두는 강박이 있었다. 가격표를 떼지도 않은 옷, 펼쳐보지도 않은 잡지, 천장까지 쌓아올려진 상자, 복도를 메운 묵직한 가구로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빠들만 제대로 된 침실을 가졌고, 쌍둥이에겐 틈새와 구석 공간만 주어졌다. 양어머니는 쌍둥이가 혹여 자기 물건을 건드리거나 음식을 몰래 먹을까 봐 신경이 곤두선 채 감시했다. 또래처럼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행글라이더 사고를 당한 양아버지가 뇌손상으로 휠체어를 타게 된 뒤 양어머니의 저장 강박과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다. 양어머니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쌍둥이는 혼자 옷도 못 갈아입게 된 양아버지를 열두 살 때부터 돌봤다.

어린 시절 제넷 밴스(왼쪽)와 재닌 밴스. ⓒ밴스 자매 제공

학교에서만은 달라지고 싶었다. 팔과 다리를 유연하게 뻗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치어리더가 되고 싶었다. 쌍둥이라는 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첫 등교부터 아시안 비하 욕설을 들었다. 치어리더들은 “중국에서 왔냐”라며 대놓고 자매를 비웃었다. 더 예민한 쪽이었던 재닌은 집에 돌아오면 자주 거울 앞에 섰다. 가족과도, 학교 친구들과도 닮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면밀히 뜯어보며 백인과 다른 자신을 남몰래 싫어했다.

재닌이 거울 속 얼굴을 미워하던 무렵, 노르웨이 톤스버그 바닷가 집 작은 방에서도 또 한 명 한국 출신 소녀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거울 속 얼굴은 자신이 결코 ‘그들’과 섞일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거울을 아무리 봐도 코와 뺨과 검은 직모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결코 알아낼 수 없었다. 단서도 없는 큰 퍼즐의 작은 조각을 맞추려고 애쓰는 기분이었다. 경숙은 자신이 어딘가 잘못된 존재가 아닌지 괴롭게 자문했다. 가족은 밝은 피부와 연한 금발, 커다란 푸른 눈을 가졌다. 학교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그랬다. 경숙은 늘 못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왜 다르게 생겼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양어머니에게 물어보면 “다른 애들이랑 전혀 다르지 않으니까 멍청한 질문 집어치우고 귀찮게 좀 하지 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 ‘몰래’ 사라진 아이들

경숙은 죽은 막내를 대신해 입양된 존재였다. 널 입양하느라 주택담보대출을 썼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계속 맞았다. 심한 말을 들었다. 원숭이보다 멍청하다고 했다. 자주 굶주렸다. 양아버지는 소녀의 몸에 손을 댔다. 작은 방은 휴식처가 아닌 은신처였다. 아이는 구석과 틈에 숨고 또 숨다 차라리 벽이 되어버리거나 죽길 바랐다. 양부모는 술과 담배에 절어 있었고, 옷도 빨아주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남과 다른 외모와 냄새 때문에 집단 괴롭힘의 표적이 되었다. 등굣길과 하굣길에 친구 대신 욕설과 폭행이 따라붙었다. 목도리와 털모자를 벗겨 진창에 처박는 아이들에게서 우정을 기대할 순 없었다. 쭉 혼자였다. 유일하게 쉴 곳은 바다였다. 가족과 학교 아이들 눈에 닿지 않는 해변에서 홀로 작은 게들을 잡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 미적거렸다. 돌아갈 때마다 매번 갓 구운 빵을 상상했지만, 굶주릴 걸 미리 알았다. 거울 속 얼굴을 미워했다.

2004년, 서른두 살이 된 쌍둥이는 처음 한국에 왔다. 해외 입양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다른 입양인들과 만난 것도, 그렇게 많은 한국인을 본 것도 처음이라 들떴다. 호텔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에서 낯선 한국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천천히 다가왔다. 재닌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품 안에서 꺼낸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재닌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국말을 쏟아냈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엔 깊은 주름이 팼고, 눈빛은 슬퍼 보였다. 봉투를 건네받고야 말았다. “감사합니다” 외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홀트 관계자에게 전해달라는 말 같았다. 봉투 속에는 서툰 영어로 눌러쓴 편지가 있었다.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아들과 말하고 싶어서요. 아들은 2003년에 서울에서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아들을 만나려고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2004. 08.”

부모가 아이를 찾는다니? 재닌은 속으로 곱씹었다. 골목을 헤매는 한 아버지의 존재 앞에서, 평생 믿어온 것들이 무너졌다. 미국 입양기관들은 한국인 부모가 아이들을 버렸다고 가르쳤다. 재닌과 제넷 역시 자신들이 ‘버려진 고아’라 믿으며 자랐다. 그래서 친가족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행사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어머니가 잃어버린 딸을 찾겠다며 나타났다. 15개국에서 모인 입양인 400여 명 사이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딸의 어깨에 반점이 있었다는 말에 모두가 옷깃을 젖히며 서로 어깨를 살폈다. 1982년생이라는 정보가 추가되자 더욱 술렁였다. 하지만 달뜬 몇 분이 지나고,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실망한 채 행사장을 떠났다. 한국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입양에 동의해준 적 없다는 부모들도 나타났다. ‘우리의 입양 역시 부모의 동의조차 없이 진행된 건 아니냐’라는 웅성임이 의심으로 번져갔다.

1969년 11월19일 한국 홀트 사무실에서 찍힌 홀트 케이스 번호 6076번 정경숙씨의 여권 사진. 가족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정씨는 1970년 1월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보내졌다. ⓒ정경숙 제공

 

전 세계 11개국에서 입양인 367명이 진실화해위의 문을 두드렸다. 정경숙씨의 입양은 진실화해위가 인권침해를 인정한 56건 중 하나다. ⓒ정경숙 제공

노르웨이에서 자란 경숙은 훨씬 더 빨리 의심을 가졌다. 홀트에서 보내진 6076번. 항상 지니고 있던 입양 서류엔 친아버지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도 ‘고아 호적’이 함께 있었다. 조작이었다.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경숙은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홀트에 연락을 취했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경숙은 곧장 가족을 찾았다. 1986년 당시 홀트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 직원이 거리를 뒤지다 우연히 경숙의 가족을 찾았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2017년에야 홀트의 한 사회복지사가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경숙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흘렸다. 홀트는 경숙의 가족 연락처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애초에 왜 가족을 찢어놓은 걸까. 1986년 한국에서 친언니와 친척들을 만나 끌어안고 울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고 느낀 순간, 그토록 그리워한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를 병으로 잃고 아이들을 위탁가정과 보육원에 맡겼던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은 곧 데리고 돌아왔지만, 막내 경숙만은 끝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죽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딸을 찾아 국내 고아원들을 샅샅이 뒤지며 헛된 단서를 좇았고 번번이 막다른 벽에 부딪혔다. 당시 한 살이었던 경숙이 홀트에 의해 노르웨이에 보내진 걸 가족들은 아무도 몰랐다. 언니가 전해준 아버지의 유언은 “경숙이를 찾아라”였다.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랑이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부모의 묘지가, 경숙이 닿을 수 있는 부모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한국 농촌의 평범한 농부의 딸로 사랑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그녀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던 곳으로 팔려갔다.

부모 몰래 사라진 아이들은 경숙만이 아니었다. 입양 시스템의 문제는 아이들을 빼돌린 데서 그치지 않았다. 보낸 뒤에도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 해외 입양 절차가 이상했다는 조짐은 쌍둥이에게도 이미 있었다. 쌍둥이는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스물다섯 살에 양어머니가 죽고서야 알았다. 남겨진 상자 속에서 입양이 합법적으로 마무리된 경우 주어지는 영주권과 함께, 아기 사진 옆에 찍힌 글씨를 발견했다. ‘Alien(외국인).’ 쌍둥이는 25년간 무국적자였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미국인이 아니었고,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도 아니었다. 법원과 정부기관이 승인한 국제 입양이었지만, 해외 입양아 20만명 중 절반 이상이 보내진 미국에서는 2000년까지 시민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았다. 양국의 방치와 행정 편의주의 아래 아동의 국적이 사라지곤 했다. 미국의 전국입양위원회(National Council for Adoption)는 여전히 약 1만5000명에서 1만8000명이 시민권 없이 미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 모든 순간에 경숙과 재닌은 서로를 아직 몰랐지만, 둘 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 재닌은 속에 쌓아두는 성향을 글로 풀어냈고, 경숙은 상처를 풀어낼 곳이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입양이 자기 삶에서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자기 서사를 만들어서 갖는 게 필요했다. 세계가 믿는 입양 신화가 자신들의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한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대륙으로 흩어졌고 얼굴도 몰랐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양은 한 가족을 연결시키지만, 다른 한 가족을 깨뜨린다”라는 게 그들이 직시한 입양의 진실이었다. 우정은 재닌과 제넷이 설립한 해외 입양인 온라인 포럼에 13년 전 경숙이 합류하며 시작됐다. 쌍둥이는 포럼에서 만난 경숙, 그리고 다른 입양인들을 모아 입양의 이야기를 새로 써보자고 독려했다. 경숙이 들려준 이야기는 쌍둥이가 줄곧 의심해온 입양 산업의 불법행위를 확인시켜줬다. 임종 직전까지도 딸을 찾아 방방곡곡을 뒤지던 경숙의 아버지는 골목에서 아들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글쓰기는 곧 〈Adoption: What You Should Know(입양: 당신이 알아야할 것)〉 등 책으로 확장되었고, 활동이 되었고, 연대로 이어졌다. 입양인들의 이야기가 엮여 책 한 권으로 묶이자 더 큰 목소리가 되었다. 협업은 좋은 우정과도 같아 순조로웠다. 각자의 고통은 책의 기둥이 되어 서로의 경험이 외롭지 않도록 지탱했다. 서로를 ‘서울 시스터스’라고 불렀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입양 ‘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유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산업을 끝내려 함께 싸우는 자매니까. 입양인으로서 존경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해리 홀트의 신화를 깨부수는 것도 그들의 일이었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이야기를 서로 이어 붙여보자 점차 더 큰 그림이 보였다.

처음엔 비슷한 입장의 해외 입양인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지만, 이젠 입양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목소리가 함께 들린다. 한 어머니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요. 우리에게 저질러진 범죄가 인정받지 못한 채 죽을까 봐 두려워요. 이 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누군가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라는 거예요. 우린 이런 일이 다음 세대에게도 반복되길 바라지 않아요.” 활동가가 된 제넷이 보기에 어떤 입양은 가난한 국가에서 부유한 국가로 아동이 흘러 들어가는 인신매매나 다름없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입양 단체들은 재난으로 취약해진 부모가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하기보다, 아이를 포기하고 서구로 보내도록 부추겼다. 아동 추방, 가족 파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70년에 걸친 한국 입양 ‘산업’의 본질도 이 거대한 맥락 안에 있다.

 제넷(입간판 왼쪽)과 재닌(오른쪽) 밴스 자매는 지역 및 전 세계 가족들을 입양 인신매매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네덜란드에 등록된 NGO인 Against Child Trafficking(ACT)와 함께 지난 2022년 6월 최초의 입양 인신매매 인식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조직했다. 미국 워싱턴주에서 열린 이 심포지엄에서는 ACT의 아룬 돌레(Arun Dohle) 대표가 아동 인신매매와 해외 입양의 교차점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밴스 자매 제공

쌍둥이 자매의 활동은 경숙에겐 등대였다. 쌍둥이에겐,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자랐지만 한없이 이타적이고 배려심 많은 인물로 성장한 경숙이 경이로운 존재다.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노르웨이로, 편지와 카드를 보내며 서로 지지했다. 경숙이 2014년 재닌에게 보낸 카드엔 “넌 숫자 이상의 존재”라고 적혀 있다. 마치 입양 시스템이 결코 그들을 숫자로 축소시킬 수 없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이. “오엘 응아티 카메이에(나는 당신의 존재를 본다)”라는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의 인사말과 함께였다. 우연히도 그건 재닌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언젠가 서로 만나는 게 꿈이 되었다. 서로를 지켜보노라면 더 잘 싸우고 싶어졌다.

70년의 침묵, 20만 개의 물음표

지리한 싸움 끝에 2022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덴마크에서 경숙을 만났다. 경숙의 입양은, 11개국에서 진정을 넣은 입양인 367명 가운데 인권침해가 인정된 56건 중 하나다. 아무도 증언해주지 않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격려받지 못한 풀뿌리 운동을 인정받은 것만 같다. 양부모가 저지른 일이 적어도 노르웨이 형법상 6년형의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학대와 방치였다는 것도 이젠 안다. 경숙은 인권침해와 인신매매 혐의로 노르웨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가 변호사와 함께 모은 증거에 따르면 북유럽 국가들은 입양아들이 위조된 서류로 도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방조했고, 외려 더 많은 아이를 보내도록 한국을 압박했다. ‘성난 입양인’ 경숙에게 곧 다가올 이 새로운 싸움은 반갑다.

2016년 밴스 자매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홀트아동복지회가 1972년 6월 쌍둥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골목에 찾아가며 준비했던 메모. ⓒ밴스 자매 제공

그나마 경숙은 진실 규명의 실마리를 찾았지만, 정보 부족이나 조사 기간 촉박으로 진실화해위가 조사를 중지한 사람이 311명이나 된다. 그 명단에 재닌과 제넷도 포함돼 있다. 둘의 입양 서류엔 서로의 존재가 없다. 쌍둥이란 사실을 숨긴 채 각자 입양을 보내려 한 흔적으로 보인다. 그간 쌍둥이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세 번이나 한국에 왔다. 한번은 생년월일과 사진이 담긴 명함을 인쇄해 거리에서 나눠주기도 했다. 홀트는 매번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2016년 마지막 방문 당시 홀트는 ‘쌍둥이들이 실제로 발견된 골목이 있다’며 주소지를 인쇄해주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 19. 그 주소조차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홀트가 권하는 헛고생”이라고 제넷이 툭 뱉었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둘은 택시에 올랐다. 한국어로 쓴 “1972년 여름에 잃어버린 한국 부모님을 찾는다”는 쪽지를 들고 송파구청 인근 텅 빈 골목을 공허한 마음으로 걸어다녔다. 쌍둥이는 여전히 엄마를 찾지 못했다.

자매는 여전히 싸운다. 제넷은 전 세계 90여 개 입양인 단체 등으로부터 해외 입양 종료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올해 7월19일 ‘국내입양에 관한 특별법’ 및 ‘국제입양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국가가 입양 절차 전반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공적 입양 체계를 도입함에 따라 민간 입양 기관에 의존해왔던 70년 된 입양 시스템이 사실상 종료됐다. 해마다 해외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 입양 정보 공개 청구를 하지만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3% 정도만 상봉에 성공한다. 해외 입양인 대부분은 정체성과 가족을 찾을 권리, 의료 정보에 접근할 권리조차 제한된 채 살아간다. 경숙은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만나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울고 웃고, 손을 잡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부모는 골목을 헤맨다. 누군가의 자녀는 거울 앞에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70년의 침묵이 만든 물음표 20만 개. 골목은 기억한다. 사라진 아이들을, 돌아와서 헤매는 아이들을, 아직도 우는 부모들을. 거울 앞에서 일어난 이들은 이제 닮은 서로를 본다.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김인정 (논픽션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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