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스와프·ESF·외평채…현 상황 10분 정리

한국과 미국의 관세협상 후속 논의가 분주합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그리고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최고위급 관료 4명이 동시에 미국에 갔습니다.
사실상 대통령 빼고 다 간 셈입니다. 험난한 협상의 막바지 '빅딜' 때 종종 연출되는 장면입니다.
■ 삼키자니 체할 듯, 뱉자니 부담
3,500억 달러(약 498조 원)는 커도 너무 큰 돈입니다.
우리나라가 한 해 수출로 버는 돈, 즉 연간 경상수지 흑자의 330%입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달러를 차곡차곡 모아둔 돈, 즉 외환보유액의 84%입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한국의 명목 GDP와 비교해도 19%나 됩니다.

최근 한미 양국 정상의 발언 내용입니다. 시각차가 극명하죠?
최종 합의가 왜 쉽지 않은지 보여주는 결정적 한 컷에 가깝습니다.
지난 7월 한국과 미국은 약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그 대신 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후 디테일(detail)에 숨은 악마가 곳곳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두 달 반이 지난 지금도 세부 합의에 못 이르고 있습니다.
핵심은 3,500억 달러를 무슨 돈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입니다.
미국은 3,500억 달러 전액을 현금, 그것도 선불로 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자 한국은 무제한 통화스와프 카드를 던졌습니다.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빌려오는 통화스와프라도 있어야 외환시장 충격이 덜 할 거라고 미국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난항입니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미국) 재무부에 제안한 바 있고 진전이 없다"며 "무제한이든 유제한이든 없다, 진전이 없다는 말"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실은 "아직 양측이 협의 중이라는 취지"라고 설명했지만, 과거 미국의 상설 통화스와프 체결 사례를 보면 한국과 체결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관련 기사] 깎아줄래 빌려줄래…‘무제한’ 스와프 카드의 속내 (2025년 9월 20일, KBS)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62893
이런 상황에서 미묘한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들고나왔다" - 조현 외교부 장관 (지난 13일)
"이해의 간극이 많이 좁혀졌다" - 김용범 정책실장(지난 16일)
뭔가 새로운 대안을 놓고 이견을 좁히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 대안 ① 달러 대신 원화 투자
많이 거론되는 건 ① 원화로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달러화가 아닌 원화 계좌를 만들어서 원화로 투자금을 넣는단 겁니다. 당장 외화 보유액을 '까먹지' 않고 현금성 투자를 할 수 있단 장점이 있습니다.
미국이 그 원화를 어디에 쓸까요. 마땅히 쓸 곳이 있을까요.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미국이 원화를 쓰겠다고 나서도 문제는 생깁니다. 한국에 재투자할 게 아닌 이상, 결국은 달러화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원·달러의 대량 환전이 일어날 텐데, 환율 충격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묘수 같아 보이지만, 결국 도긴개긴인 셈입니다.
조영무 NH금융연구소장은 "원화로 미국 공장용지를 사고 인건비를 준다고 해도, 그 원화를 역외 시장에서 환전하려고 하면 어차피 환율이 뛴다"며 "이 방안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일각에선 외환시장을 이용하지 않고 미국 내 한국 기업이 보유한 달러와 맞바꾸는 방식도 거론됩니다. 그 막대한 달러를 들고 있을 기업이 얼마나 될까요? 역시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원화로 투자하려 해도 원화를 어디선가 가져와야 합니다. 3,500억 달러는 거의 500조 원입니다. 아무리 우리 돈이어도 쉽지 않습니다. 정부의 1년 예산이 700조 원을 조금 넘습니다.
■ 대안 ② 아르헨티나 방식
다음은 이른바 ② '아르헨티나 방식'입니다.
최근 아르헨티나는 200억 달러의 통화 스와프를 미국과 체결하면서, 그만큼의 페소화를 연방준비제도가 아닌 재무부에 줬습니다. 재무부는 그만큼의 달러화를 외환안정기금(Exchange Stabilization Fund, ESF)에서 꺼내줬습니다.
통화스와프도 어려운데, 어려운 용어가 또 나왔습니다. 외환안정기금(ESF).
ESF는 미국 재무부가 보유하고 있는 일종의 '안전판'입니다. 주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외환을 사고팔 때, 혹은 금융위기를 맞은 외국 정부나 기관에 대출해 줄 용도로 주로 씁니다. 아르헨티나 사례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통화스와프는 미국 연준이 결정하지만, ESF는 미국 재무부 장관이 운용합니다. 대통령 뜻에 따라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입니다.
ESF에 쌓인 달러를 한국에 주고, 대신 한국의 원화를 미국 재무부가 받아 가는 그림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달러를 미국 연준(통화 스와프)에서 받건, 미국 재무부(ESF)에서 받건,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는 달러인지는 미국의 사정이니까요. 여기까지만 보면, 나름 묘수 같습니다.
그런데 ESF에 3,500억 달러가 있을까요? 미국 재무부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 8월 말 기준 ESF의 총자산은 약 2,200억 달러입니다.
여기서 각종 부채를 제외하고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약 400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아르헨티나에 200억 달러를 지원했으니 남은 건 200억 달러 수준일 것입니다.
'간의 기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 대안 ③ 외국환평형채권
또 거론되는 아이디어는 ③ 외국환평형채권을 발행하는 방안입니다. 또 어려운 단어가 나왔죠.
외국환평형채권은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외평채를 달러화로 발행하고, 그걸 투자자가 사주면 우리는 달러를 조달할 통로가 생깁니다.
문제는 나랏빚이란 점입니다. 달러로 발행하건 원화로 발행하건, 정부가 찍는 채권은 나랏빚입니다. 안 그래도 국가 채무가 많다는 논란이 끊이질 않는데, 거기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더구나 달러 빚, 즉 외채입니다. 외채가 쌓이면 어떤 파국이 올 수 있는지, IMF 외환위기 때 온 국민이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설사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외평채를 발행한다고 해도, 3,500억 달러나 되는 거액이 시장에서 소화될지도 미지수입니다. 한국 정부가 달러가 궁하다는 게 소문이 다 날 텐데, 투자자들이 쉽게 사 줄까요. 금리를 많이 줘야 그나마 팔릴 수 있습니다.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막히자, 마치 묘수 찾기 하듯 각종 실험적 대안이 쏟아지지만,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 결국 중요한 건 '플랜 A'
중요한 건 통화스와프부터 원화 투자, ESF 등은 한국 입장에서 플랜 B, C, D에 해당할 뿐이란 겁니다.
구 부총리는 " 통상 협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국의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우리 측 김정관 산업부 장관하고 하는 그게(그 협상이) '메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플랜 A'란 3,500억 달러라는 규모 자체를 조정하는 겁니다. 만약 미국이 너무 완강해서 도저히 금액에 손을 댈 수 없다면, 현금 비중이라도 최소화하는 겁니다.
3,500억 달러를 최대한 대출이나 보증으로 구성하고, 현금은 최소화한다면, 그나마 견뎌볼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원·달러 환율 급등을 초래하지 않고, 한국이 1년에 쓸 수 있는 달러는 200억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겠습니다. 만약 미국과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 5년 동안 매년 200억 달러씩, 총 1,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한다
- 나머지 2,500억 달러는 대출이나 보증 형태로 투자를 지원한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통화 스와프나 그걸 대신할 실험적 대안에 꽂혀 있지만, 훨씬 더 중요한 건 3,500억 달러 본체란 뜻입니다.
구 부총리는 "한국 산업부와 미국 상무부 간 어떤 '스킴'(계획)이 확정되고 나면 그에 따라 외환 수요가 나올 것"이라며 "(3,500억 불을) 선불로 내면 외환 수요 상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나오면 그에 따른 외환 소요가 어떻게 되는지 나오고, 그 수요를 한국 외환 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범위 내에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느냐 판단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현금 비중 줄일 확률 70%"
지난달 노무라 싱가포르는 한미 관세 협상에 대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박정우 이코노미스트는 아래처럼 협상 시나리오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이 가운데 혼합형이 타결 가능성이 70%로 가장 높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혼합형 시나리오는, 한국이 현금 투자를 최소 350억 달러, 최대 700억 달러로 깎고 나머지를 대출 보증으로 소화하면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는 안입니다.
보고서는 합의의 신뢰성을 미국에 납득시키는 걸 핵심 과제로 꼽았습니다. "한국이 강력한 모니터링 메커니즘과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의 조건을 제시한다면, 거시 기초 체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산업적인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균형 잡힌 경로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미국이 끝까지 많은 현금을 요구해 그대로 타결되거나, 아예 협상이 어그러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봤습니다.
왜 그렇게 봤을까요.
김진욱 씨티 이코노미스트의 지난달 보고서에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도 시나리오 두 개를 설정했습니다.
시나리오 1은 한국의 '깎아달란' 요구를 미국이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안입니다. 시나리오 2는 협상이 깨지고 미국이 경제적 압박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에 25%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인데, 김 이코노미스트는 전자로 타결될 가능성을 높게 봤습니다.
한국과 합의해야 미국에도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조선 산업 재건 등에 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한 점이 대표적으로 거론됐고, 두 국가 모두 무역 관계를 파탄 내고 싶지 않을 거란 거죠. 현재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한 정부 관계자들이 한미 조선 협력, 즉 '마스가(MASGA)'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로 풀이됩니다.
■ 최종 결판은 APEC에서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현지 시각으로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과의 이견이 해소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향후 10일 안으로 무엇인가를 예상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한국과의 협상을 마무리 지을, 그것도 '빨리' 마무리 지을 이유가 또 있습니다. 중국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중국은 반도체 등 산업에 꼭 필요한 희토류에 대한 수출 통제 강화 카드를 꺼내 들었고, 미국산 대두에 대해서도 수입 중단 조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대중국 관세를 100%로 올리겠다는 등 다시 무역 갈등으로 번지는 모양새입니다.
미국은 안 그래도 중국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인데, 협력 관계인 한국과의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끌어봤자 더 쥐어짤 수 있는 돈도 없습니다.
당장 이번 달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주목을 받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협상이 타결되는 '그림'을 만들면 좋지 않겠냐는 구상입니다.
구윤철 부총리는 "그래도 APEC 계기로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하는 게 국익의 관점에서 도움이 된다면 그래도 가장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그런 계기를 활용해서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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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기자 (vox@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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