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만 100개, 옷은 같은 것만…'몽마르트르의 괴짜' 에릭 사티

2025. 10. 1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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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 엉뚱한 행동과 기괴한 농담으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사진 사회평론]
프랑스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빠지지 않고 가는 곳이 몽마르트르이다. 해발 129m밖에 되지 않으니 ‘몽’이라 불릴 정도의 산은 아니지만 파리에서는 여기가 제일 높아서 시내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웅장한 비잔틴 양식의 하얀 돔으로 지은 사크레쾨르 대성당. 하지만 몽마르트르를 관광 명소로 만든 진짜 주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이곳에 모여든 화가들이다. 피카소를 비롯하여 고흐, 모네, 드가, 르누아르, 로트렉, 모딜리아니 등 몽마르트르에 둥지를 틀었던 미술가는 셀 수 없이 많다.
‘흐물흐물한 전주곡’ 등 유머작품도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몽마르트르 지역의 일요일 오후를 묘사했다. [사진 사회평론]
이들이 몽마르트르에 몰려든 것은 무엇보다 이곳의 집세가 쌌기 때문이다. 1860년에서야 파리에 편입된 몽마르트르는 파리 코뮌의 본거지이자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유로 주거 지역으로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예술가나 하층민들이 주로 살았고, 개성 넘치는 이들이 모여들면서 몽마르트르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당시 몽마르트르에는 별난 기인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최강의 괴짜 예술가가 바로 에릭 사티였다.

사티에게는 시기에 따라 사제, 신사, 관료 등 자신이 설정한 페르소나가 몇 개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것에 맞게 똑같은 옷을 준비해서 늘 그것들만 돌려 입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우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지독히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우산에만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사후 유품 속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것을 포함해 우산이 100여 개나 있었다고 한다. 엉뚱하고 기괴한 농담도 그의 특기였다. 예를 들면 “나는 흰 음식만 먹는다. 삶은 달걀, 설탕, 갈아낸 뼈, 죽은 동물의 지방…”과 같은 식이었다.

그렇다고 사티의 궤변이 실없기만 한 말장난은 아니었다. 사티는 자신이 썼던 글들을 ‘포유류의 공책’과 ‘기억상실자의 기억’이라는 난해한 제목으로 분류했는데, 그의 비꼬는 듯한 농담들 속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그의 명석한 통찰과 예민한 지성이 반짝인다. 사티의 유머와 풍자가 얼마나 기발한 지 일본의 음악학자 시이나 료스케가 그중 30개를 추려 『사티가 남긴 서른 구절의 말』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냈을 정도다.

사티는 누군가 대가인 척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는 적이 없었다. 사티의 단골 표적은 비평가들이어서 이들을 신랄하게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이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프랑스 주류 음악계에 대한 사티 나름의 복수이기도 했다. 사티는 대중적인 샹송들 외에, 20대 초반부터 부드럽고 매혹적인 왈츠 ‘짐노페디’와 조표와 세로줄을 없애고 중세로 회귀한 ‘그노시엔’ 등 매우 혁신적인 작품들을 작곡했으나, 평단은 그를 아마추어 음악가 취급했다. 사티가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사티도 프랑스의 최고 명문인 파리음악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사건건 부딪치던 새엄마가 보낸 학교였던 까닭에 학업에 충실하지 않았고 결국 3년 만에 퇴학을 당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신을 키워줬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열 살 연상의 깐깐한 음악 교사와 재혼했으니 계모와 좋은 사이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3년 후 학교에 다시 입학했으나 이번에는 고압적인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군대에 자원입대해 버렸다.

제대한 후 그가 처음 거처를 마련한 곳이 몽마르트르였다. 사티의 집은 당시 도데, 모파상, 졸라 같은 시인과 작가들의 아지트였던 ‘검은 고양이’ 옆에 있었는데, 사티도 처음에는 손님으로 드나들다 이곳의 전속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검은 고양이’는 그 유명한 ‘물랭 루즈’보다 8년 앞서 문을 연 세계 최초의 극장식 카바레였다. 하지만 이내 주인과 다투고 ‘오베르주 뒤 클루’로 옮겨서 일했고 그렇게 10년을 몽마르트르에서 살았다.

사티는 늘 가난했으나, 세 살 아래 동생 콘라드는 향수 산업에 종사하는 화학자로 성공했다. 콘라드와 에릭 사티 형제의 관계는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 형제와 매우 비슷해서, 예술적 이상 때문에 현실적인 고충을 겪는 형을 위해 동생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동생에게 돈을 받거나 꾸는 일이 다반사였음에도 둘의 관계는 예민했던 형의 기분에 따라 절연과 회복을 반복하곤 했다. 마지막 절교는 제수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 때문에 동생은 형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형의 죽음조차 나중에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

동료 음악가들과의 관계 역시 뜨겁게 의기투합했다가 한순간에 끝장나기를 반복했다. 사티 이상으로 반골에다 자존심마저 강했던 클로드 드뷔시와 사티가 16년간이나 우정을 유지한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사티보다 4살 위였던 드뷔시가 한참 방황하던 시절.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라고 사티가 추억할 정도로 둘은 친했으며 하루가 멀다고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새로운 음악의 방향을 토론하며 지냈다. 아무도 모르던 사티의 ‘짐노페디’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에라르 홀에서 연주한 것이 드뷔시였고, 드뷔시가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할 때 증인을 서준 것이 사티였다.

1902년. 드뷔시가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내놓으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프랑스 특유의 미학을 제시했을 때 사티는 기쁨보다는 충격이 컸다. 혼자만이 뒤처진다는 느낌이었으리라. 그 영향 때문일까. 사티는 39살의 늦은 나이에 파리의 사립 음악학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한다. 대위법과 음악 이론을 공부하고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에게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1911년 모리스 라벨을 주축으로 기존 음악계의 주류와 맞서려는 젊은 작곡가들이 만든 ‘독립음악협회’가 사티를 띄우기 시작했다. 라벨은 독립음악협회의 연주회에서 사티의 ‘사라방드’와 ‘짐노페디’를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며 그를 “일찍이 사반세기 전에 대담하게 미래의 음악을 예언한 천재적 선구자”라고 치켜세웠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이때부터 사티는 ‘바짝 마른 배아’ ‘개를 위한 흐물흐물한 전주곡’ ‘자동 기록’ ‘모든 방향을 향한 책의 장들’ ‘뚱뚱한 나무 인형 영감의 크로키와 짜증’ ‘좌우로 보이는 것(안경 없이)’ ‘심술궂은 방해’ ‘아침의 황혼’ ‘바위처럼 단단한 공황 상태’ 등 익살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일련의 ‘유머작품’들을 쏟아낸다.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제목들을 먼저 지은 후 작곡을 했으며, 작곡한 다음에는 악보에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같은 지시어가 들어갈 자리에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같은 기묘한 말들을 캘리그라피 같은 정자체로 적어 넣었다.

친구 드뷔시에 자극받아 39세 때 학교다녀
사티의 음악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프랑스 작곡가 ‘6인조’. [사진 사회평론]
1917년. 사티는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을 맡은 획기적인 발레 ‘파라드’를 작곡하며 일약 진보 예술가의 태두로 부상한다.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할 때 다른 누구보다도 칭찬해 주기를 기대했던 드뷔시는 끝내 그의 초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내막이 있을 거라는 주장을 하면서 사티의 성공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티는 드뷔시에게 모욕에 가까운 편지를 보냄으로써 임종을 앞두고 있던 드뷔시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겼다. 드뷔시에게만 가혹했던 것도 아니다. 사티를 수호자라고 존경했던 플랑크, 오네게르, 미요, 오리크 등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프랑스 ‘6인조’에 대해서도 성공을 위해 경박하게 잠깐 뭉친 그룹이라며 이내 내쳐 버렸다.

혼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사티는 집중해서 들을 필요는 없으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데 필요한 카바레 음악의 미학에 천착한다. 가구처럼 유용하지만 도드라지게 돋보이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이른바 ‘가구 음악’이다. 1920년 3월 파리의 한 화랑에서 이를 처음 시도할 때 음악이 지나가던 이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었는데, 그러자 사티가 사람들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듣지 마세요! 그냥 걸어가세요. 이야기하세요”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반항적이고 뒤틀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사티. 그럼에도 결코 해학을 잃지 않았던 그. 그런 괴팍한 겉모습 속에 어쩌면 평범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느 방에나 놓여있는 가구를 닮은 그의 음악처럼.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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