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파탈의 예쁜 댄서로만 알았습니다”…‘20년 베테랑’ 무희의 최후, 논란의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마타 하리 편]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
그녀를 둘러싼 수수께끼들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마타 하리는 1917년 10월 15일, 이 무렵에 사망했습니다.
심장을 겨눈 총구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교외의 가설 사형장. 극형을 받고 이곳에 온 마타 하리는 제 삶을 되짚었다.“희대의 요부”, “‘병사 5만명의 목숨값을 쥐고 흔든’ 스파이”…. 환청일지도 모를 막무가내 비난이 귓가를 때릴 때도, 그녀는 생에 대한 복기(復棋)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마타 하리는 눈을 뜬 채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벌렸다. 열린 입으로는 공기를 머금었다. 처형용 눈가리개를 거절한 덕에 느낄 수 있는 정취였다.
이쯤 그녀가 옷을 벗어 던지곤 완전한 알몸을 보였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과장된 낭설일 터였다.
M.G. 젤러 씨.
마타 하리는 자신의 본명을 부르는 판사 말에 응했다. “군법 회의가 당신의 스파이 혐의를 유죄로 결론 내렸다는 걸 알고 있을 거요. 그런 만큼, 지금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오.” 어느덧 마타 하리 앞에는 열두 명의 사수가 서 있었다. 이들의 총구는 한 곳만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었다. 마타 하리는 이 모습이 두려웠다. 그런 한편, 입술 가장 자리에선 씁쓸한 조소도 피어올랐다.
그녀는 과거를 되짚었다.
“저를 매춘부라 부르는 건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배신자라고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재판이 한창이던 당시, 마타 하리는 본인의 스파이 혐의에 대해 이런 말로 맞섰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마타 하리의 말 따위 듣지 않았다. “욕망에 찌든 사기꾼!” 그녀는 모두에게 이런 조롱이나 받을 뿐이었다.
![오데온 극장의 마타 하리, 1910 [Chéri-Rousseau]](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17/ned/20251017235159038rbqe.jpg)
마타 하리는 우리 편의 장교 다수를
침실로 끌어들였어요.
이 과정에서 국가 기밀을 빼돌렸고,
그것을 적군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래요.
어서 쏘세요.
곧 총성이 울렸다. 쿵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총기가 내뿜은 연기 뒤에는 어떤 장면이 펼쳐져 있을까.
그런가 하면, “나는 희생양”이라고 강변한 마타 하리 대 “그녀는 악질 스파이”라고 못 박은 프랑스 당국. 양측 사이 진실을 말한 이는 누구였을까. 이것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글이다.
본래 평범한 여성이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녀 스파이로 통하는 여인, 마타 하리.
평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본인을 자바섬 공주 또는 인도네시아 여사제 출신으로 소개하곤 했다고 한다. 몽롱한 표정과 신비로운 자태를 곁들인 채.
하지만, 사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출생한 보통 여성이었다. 부모가 그녀에게 붙인 이름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 이에 대한 줄임말이 M.G. 젤러였다.
그렇다면 ‘마타 하리’가 되기 전, 젤러로의 삶은 어땠을까.
1876년생의 젤러는 어릴 적부터 쉽지 않은 생을 살긴 했다. 아버지는 모자 공장과 가게를 운영했다. 수익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큰 결정을 앞두고 판단을 잘못했다. 그 결과, 허무하리만큼 쉽게 파산했다. 어머니는 그쯤부터 생기를 잃었다. 실패가 불화를 부추겼는지, 두 사람은 이혼으로 인연을 끝맺었다.
졸지에 친척 집으로 보내진 젤러는 그곳에서 유치원 교사를 꿈꿨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육기관 교장이 문제였다. 대놓고 그녀를 희롱했다. 그녀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미래를 접은 채 재차 몸을 옮겨야 했다.

그러다 1895년.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된 젤러는… 갑자기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주둔 장교, 루돌프 매클라우드. 나이 차는 위로 스무 살이었다.
젤러는 이제 베테랑 군인의 부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꿈 또한 짓밟혔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도 하나씩 낳았지만… 그와도 얼마 안 돼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폭력과 바람, 알코올 중독증이 이혼 원인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런 와중에 금쪽같은 아들도 일찍 죽었다. 그녀 혼자서는 경제력이 없었기에, 그나마 남은 딸마저 온전히 양육할 수 없었다. 불행의 창은 그렇게 그녀 삶을 또 한 번 꿰뚫었다. 이제 젤러에게 남은 건, 아름다움. 그것밖에 없어보였다.
사실, 젤러의 외모는 스쳐가는 모든 이를 돌아보게 할 만큼 매력적이기는 했다.
그녀는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올리브빛 피부, 큰 갈색 눈을 갖고 있었다. 날씬하고도 유연한 몸매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러한 ‘자산’ 덕에 그런 고생을 겪고도 요염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계속해 풍길 수 있었다.
아울러 젤러는 훗날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즉, 그녀에게는 나름의 지성미도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춤을 추는 마타 하리, 1905 [P. Boyer]](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0/17/ned/20251017235200082fepc.jpg)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도 주목받는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었다. 춤이었다.
젤러는 특히 동양풍의 관능적인 춤을 잘 췄다. 젤러는 앞서 장교와의 무료한 결혼 생활 중 취미로 춤을 배웠었다. 그게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던 것이었다.
젤러는 타고난 미모, 이를 부각할 수 있는 간드러진 춤 재주를 안고 또 한 번 꿈을 꿨다. 무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희가 되는 것이었다.
젤러는 새로운 소망을 안고 배에 올랐다. 그녀가 간 곳은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도시, 프랑스 파리였다.
젤러의 파란만장한 삶 속 아직 스파이란 말이 나올 틈은 없다. 그녀 또한 이 무렵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본인 삶이 곧 계략과 음모, 정치와 전쟁으로 물들게 될 것이라곤.
춤으로 도시를 매혹하다

마타 하리. 인도네시아어로 ‘태양(하루의 눈)’.
파리로 온 젤러는 이름 또한 이처럼 신비로운 투로 바꿨다. 그녀가 마타 하리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마타 하리가 된 그녀는 애타는 춤으로 밤무대를 누볐다.
마타 하리는 유럽인들 앞에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전통 춤을 선보였다. 더 끈적하고, 더 야시시한 자태로 이를 내보였다. 때로는 몸에 두른 일곱 겹 베일을 하나씩 벗는 파격적 동작도 보였다고 한다.
“고양이 같은 교태. (…)
그녀 몸이 그리는 수천 개 곡선은 수천 개 리듬으로 떨렸다.”
“날씬하고, 다리가 길고, 야생동물처럼 유연하며 (…)”
마타 하리는 이런 분위기를 즐기며 살았다.
사내들이 자신과의 하룻밤 환상을 꿈꾸는 걸 알고선 은밀한 거래도 주고받았다. 그렇게 낮에도, 밤에도 바쁜 시간을 이어갔다. 그녀는 국경을 넘나들며 수많은 군인, 정치인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던 1914년 11월의 어느 날, 검은 옷의 한 무리가 그녀를 찾아왔다. 예고 없이, 조용하게.
사실 마타 하리가 수년간 교태 어린 몸짓을 보이는 사이, 유럽의 많은 정보기관이 그녀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왜? 이들이 마타 하리에 대해 주목하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각국 고위층과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가깝다. 둘째. 말을 잘하고, 특히나 외국어에 능하다. 당시 유럽 땅에선 전운(戰雲)이 드리우고 있었다. 정보기관 책임자의 시선으로 볼 때 마타 하리의 두 능력은, 스파이로 나서기에 최고 덕목이었다.
그러다 결국 1914년, 7월. 쌓이고 쌓인 긴장감이 폭발하고, 전쟁이 발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그 해, 어느덧 서른여덟이 된 마타 하리. 그녀는 여전히 대도시를 돌며 무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쯤 조용히 찾아온 검은 옷 무리의 정체, 그들은 다름 아닌 독일군 정보부였다.
당시 독일은 범상치 않은 군사력으로 주변국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 독일 입장에선 말 잘하고, 인맥 넓고, 국경선을 넘나드는 데 익숙한, 딱 마타 하리 같은 ‘인재’가 절실했다.
“사례는 괜찮게 하겠소.” 이 말을 들은 마타 하리의 동공은 크게 트였으리라. 낭만적 기질이 있던 그녀에게 그 제안은, 아울러 ‘섭섭지 않은’ 보수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터였다. 그녀는 그렇게 어둠의 세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파이로 유능했을까, 무능했을까

그렇게 ‘스파이’ 세계를 알게 된 마타 하리.
그녀는 우선 독일로 갔다. 발이 닿은 땅은 쾰른(또는 프랑크푸르트). 거기에는 극비로 운영되는 스파이 교육 기관이 있었다. 마타 하리는 그곳에서 기초 군사 지식과 당장의 국제 정세를 배웠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독일 정보 역사 사전(Historical Dictionary of German Intelligence)≫에 쓰인 내용들이다.
마타 하리는 특히나 정보 보고를 중심으로 한 활동에 나서야 할 만큼, 쉽게 식별되지 않는 특수 잉크 사용법도 익혔다고 한다. 그녀가 교육 중 뜻밖의 뛰어난 관찰력을 보였다는 말도 있다.격정적인 면이 있어 염려를 샀다는 후문 또한 따라온다.
①독일의 적인 프랑스 고위 인사를 유혹하라.
②그들을 구슬려 쓸만한 정보를 갖고 오라.
다만,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글을 읽어야 한다.
허구가 끼어들 틈 없이 정확한 사실을 뜻하는 말, 팩트. 이 팩트를 흔드는 가장 강력한 적이 둘 있다. 하나는 충돌하는 정치, 또 다른 하나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가뜩이나 치열한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뒤섞이면 높은 확률로 끈적한 결과물이 튀어나온다.
그것의 이름은 전쟁이다. 전쟁 앞에서는 많은 순간 진실이 허구가 되고, 허구가 진실이 된다. 전쟁이 끌어낸 포화 속에선 보통 사람의 역사도 쉽게 오염되는데, 스파이의 역사야 오죽하겠는가.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스파이로의 마타 하리에게 따라붙는 ‘도시 전설’ 중 어디서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니면…손바닥 위 놓여 있었을까

마타 하리는 정말 영국의 탱크 설계도를 빼돌리는 데 역할을 했을까.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내용은 이렇다. 비밀 임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온 마타 하리는 얼마 안 가 프랑스의 유력 장군을 유혹한다. 방법은 쉬웠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무도회를 열었다. 초대장을 받고 온 장군이 모습을 보이자, 끈적한 춤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신 방으로 가고 싶어요.” 마타 하리는 장군에게 속삭였다. 욕망에 물든 장군은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겹겹이 가로막힌 문이 열렸다. 둘은 거기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마타 하리는 곯아떨어진 장군을 뒤로한 채 금고에 다가갔다. 그런 뒤 어떻게 암호를 푸는 데 성공했고, 이를 독일군에 통째로 넘겼다는 이야기다.
그뿐인가. 마타 하리가 독일에 적군 협상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독일은 이들과 대치하는 동맹국 소속이었다) 수송선단의 위치를 알려줬고, 협상국의 전차 무리가 특정 교전지로 출전할 수 있다는 식의 정보를 전했다는 설도 있다. 그녀가 프랑스 항공대에 종군 간호사격으로 자원, 여러 조종사와 관계를 맺으며 정보를 캐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밖에 각계 장관급 인사와 정을 주고받으며 이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보고했다는 말까지도 나온다.
하지만 앞서 일러뒀듯,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도 일단 이까지만 보면 그녀가 최소한의 ‘밥값’ 정도는 했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쯤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짚어볼 건, 마타 하리의 활동에 대해 전혀 반대되는 설 내지 기록도 있다는 점이다.
애초 그녀가 스파이로 나설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 그게 핵심이다.
…저 여자. 갑자기 독일로 가더니, 또 얼마 안 돼 프랑스로 돌아온다? 수상한데?
1차 대전 직전부터 마타 하리를 주시하던 영국과 프랑스 등 타국 정보기관은, 전쟁 직후 그녀가 보인 수상한 행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도 한다. 그녀는 일찌감치 협상국의 감시망에 있었고, 이들의 견제로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말도 나온다. 영국 보안국 MI5 또한 그녀는 독일에 ‘유의미한’ 정보를 주지 못했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오죽하면 마타 하리를 섭외한 독일조차도 그녀를 ‘불발탄(Versager·실패작)’으로 불렀다는 설마저 있을 정도니.
그러면 영국과 프랑스 정보기관은 왜 그녀를 미리 처단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선 핵심 연루자 포착을 위한 시간 끌기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대세에 지장 없는 정보를 일부러 흘리며, 그녀를 부리는 몸통 찾기에 착수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다면 마타 하리는 처음부터 손바닥 위에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몇 차례 아슬한 순간을 넘긴다. 하지만, 누구든 언제까지고 운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1917년 2월13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한 호텔에서 체포됐다. 붙잡힌 당시에도 알몸으로 소파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는 식의 말이 있지만, 이 또한 ‘믿거나 말거나’에 가깝지 않을까.
붙잡힌 마타 하리는 항변했다

수많은 가설과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 정보기관 모두 마타 하리가 중대한 첩자였다는 ‘결정적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것. 그러니까, 심증과 정황은 있지만 손에 잡히는 확실한 무언가가 없었다는 것(그것은 철저한 인멸 때문일까, 정말 없어서였을까). 이 부분만큼은 분명하다.
“저는 정말 아니에요!”
체포된 마타 하리 또한 혐의를 강하게 부정했다. 1차 대전 초기 독일로 간 건 새로운 무대를 찾기 위해서, 잦은 출입국은 당시 남자친구였던 러시아 장교 때문이었다는 취지의 항변을 했다고 한다.
제 국제적 인맥은 무희로서 제 직업 덕분일 뿐,
다른 어떤 이유 때문도 아니에요.
(…)
저는 실제로 스파이 행위를 한 게 없어요.
제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 끔찍해요.
그런데 잠깐.
단지 실력이 좋고 나쁨의 문제일 뿐, 어쨌거나 마타 하리가 스파이로 나선 건 사실이지 않은가. 이처럼 절절하게 자기변호를 할 일인가. 헷갈림이 더해진다. 실제로 몇몇 학자는 붙잡힌 직후 마타 하리가 보인 절박한 행보를 놓고, 그녀는 단순히 ‘순진하고 쉽게 속는’ 여성이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무언가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한 행동이 스파이짓임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취지다.
마타 하리는 진실을 말했을까. ‘스스로 믿는’ 진실을 토로했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교육받은 거짓을 말했을 뿐일까.

사실 관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보면 그녀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마타 하리가 잡힌 시기가 최악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1차 대전 중 학살에 가까운 전투를 겪으며 고통받고 있었다. 수십만명이 죽고, 이보다 더 많은 이가 부상으로 신음했다. 프랑스는 침울의 늪으로, 절망의 바다로 침잠(沈潛)하는 모습이었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프랑스 당국은 무언가 화끈한, 완전히 자극적인 소재를 띄워야 했다.
유명한 미녀 무희가
우리 땅에서
심각한 수준의 스파이짓을 벌이다 발각됐다.
결과적으로 MI5 기밀문서에 따르면, 마타 하리는 수감 생활 중 끝내 독일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실토했다. 다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가 빼낸 정보는 우리 연합군 5만명의 목숨을 잃게 할 만한 것이었다.” 프랑스 재판부는 마타 하리에게 이런 혐의를 얹어 사형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이를 뒷받침할 완전한 증거는 여전히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슬쩍 넘어갈 수 있지만, 이 부분을 짚어야 한다. ‘스파이짓을 했다’와 ‘5만명의 목숨값을 쥔 스파이짓을 했다’는 건 같은 듯 교묘하게 다른 말이니까.
기구한 삶, 기구한 역사

다시 1917년 10월 15일, 처형의 날.
총알이 마타 하리의 몸을 뚫었다. 그녀는 잠시 비틀거렸다. 먼저 무릎을 꿇고, 그 다음 허리를 굽히며 쓰러졌다. 간부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확인 사살을 했다. 마타 하리는 그렇게 죽었다. 사형이 선고된 지 3개월 만이었다. 사망 당시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주검은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됐다.
그녀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녀에 대한 뒷맛은 여전히 개운치 않다.
혹시나, 혹시나… 마타 하리는 겉으로는 어수룩할 뿐, 실은 증거 인멸조차 깔끔하게 해낸 완벽한 스파이일 가능성도 있을까. 물론 그보다는 MI5의 기록처럼 “중요한 군사 정보를 빼낸 증거 따위 없는”, 사형을 당할 수준은 결코 아닌 순진한 정보원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게 아니면 애초 혹독한 수감 생활에 자포자기해 “그래. 내가 스파이다!”라는 말까지 지어낸, 실제로는 단지 남자를 잘 유혹하는 무희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며,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그녀의 정체를 놓곤 진실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만 있을 뿐, 이를 손안에 쥘 수는 없을 것이다. 기구한 삶이며, 기구한 역사의 단편이다.
영국 보안국(MI5)
Mata Hari, Enrique Gomez, Carrillo, Severus Verlag
Mata Hari Decrypting The Spy Game Surrounding Her Life And Death, Truman, Davis, Vincenzo Nappi
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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