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 독성 물감 만드는 심해 생물 발견] 렘브란트의 ‘야경’ 만든 물감, 심해 지렁이에겐 갑옷

이영완 조선비즈 사이언스조선 부장 2025. 10. 17. 13: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1642년 작 ‘야경’. 물감 속 납과 황 성분이 만나 검게 변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어둠이 더 짙어졌다. /위키미디어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1642년에 그린 ‘야경(夜警)’은 제목이 잘못 붙었다. 순찰 중인 민병대를 그렸지만, 분명 밤이 아니라 낮이 배경이다. 그림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중심부만 밝게 그린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회화 기법이 밤 풍경을 그린 듯한 느낌을 줘 100년 뒤에 야간 순찰로 추측해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

밤 풍경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물감의 화학반응이다. 렘브란트는 납이 들어간 물감을 많이 썼다. 흰색을 내는 연백(鉛白)이 대표적이다. 물감 속 납은 황 성분과 만나면 검게 변색하는 특징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야경의 밤은 계속 깊어진 셈이다.

화가들이 사랑하던 독성(毒性) 물감을 만드는 심해(深海) 생물이 발견됐다. 중국과 학원 해양연구소의 리차오룬(李超倫) 박사 연구진은 “뜨거운 물이 분출되는 심해 열수분출구(熱水噴出口)에 사는 다모류(多毛類· Paralvinella hessleri)가 세포에서 독성 비소와 황을 결합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8월 26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플로스 생물학(PLOS Biology)’에 발표했다. 1970년대 해양학자들은 심해저 화산 지대에서 뜨거운 물이 분출되는 열수분출구를 발견했다. 햇빛도 들지 않는 곳이지만 그곳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지구 초기에 이런 곳에서 생명체가 탄생했을 것으로 본다.

1 오키나와 해구에서 발견된 심해 다모류. 몸에 황화비소 입자가 있어 밝은 노란색을 낸다. 2 심해 다모류 조직. 곳곳에 황화비소 입자(노란색)가 보인다. 플로스 생물학 3 비늘발달팽이(Chrysomallon squamiferum). 황화 철이 칼처럼 돋아 있다. /Chong Chen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

다모류는 지렁이나 지네같이 굵은 털이 많은 환형동물을 말한다. 연구진은 일본 오키나와 인근 심해 열수분출구에 사는 ‘파랄비넬라 헤슬러리(Paralvinella hessleri)’라는 학명(學名)의 다모류를 로봇 잠수정(ROV)으로 채집했다. 연구진은 파랄비넬라 헤슬러리의 피부와 장기 세포에서 황화물과 비소가 체중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확인했다.

바닷물이 해저 산맥의 깨진 틈 사이로 들어가 엄청난 온도의 마그마를 만나면 주변 광물을 녹인다. 높이 30m의 굴뚝 모양 열수분출구에서 분출되는 뜨거운 물에는 이렇게 녹은 광물이 많이 들어있다. 독성을 띠는 황화물과 비소가 대표적이다. 둘 다 독성 물질인데 심해 지렁이가 멀쩡한 것은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전략 덕분이었다.

분석 결과, 심해 지렁이는 먼저 비소 입자를 축적한 후 황화물과 반응시켜 덜 위험한 노란색 광물인 황화비소(As₂S₃) 입자를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몸에 광물을 만드는 생물광물화(biomineralization) 반응이다. 논문 제1 저자인 왕하오(王昊) 박사는 “로봇 잠수정 모니터에서 밝은 노란색의 파랄비넬라 헤슬러리는 어두운 열수분출구 풍경 속에서 선명하게 돋보였다”고 말했다.

황화비소는 고대부터 19세기까지 화가가 물감으로 애용한 물질이다. 고대 이집트 예술가는 황화비소를 쪽과 혼합해 짙은 녹색을 만들었다. 르네상스기 화가인 티치아노와 라파엘로는 황화비소로 그림에 황금빛을 구현했다.

바로크 시대 렘브란트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연구진은 2017년 렘브란트의 1665년 작(作) ‘유대인 부부’에서 금색을 낸 웅황(雄黃·orpiment)을 찾아냈다. 바로 노란색이나 주황색을 낼 때 쓰는 물감 성분인 황화비소다.

왕하오 박사는 “이번 발견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점은 이 벌레가 만드는 독성 황금색 광물인 웅황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화가에게 귀중한 물감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라며 “생물학과 미술사가 바다 깊은 곳에서 흥미롭게 교차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독성 물질로 갑옷 두른 심해 생물들

황화비소는 독성이 강해 지금은 물감에 쓰이지 않는다. 심해 지렁이도 물감 대신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독으로 독을 중화한 황화비소 입자는 갑옷처럼 지렁이를 둘러싸 유독 환경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지렁이처럼 광물로 둘러싸 몸을 보호하는 심해 생물은 또 있다. 2003년 처음 발견된 비늘발달팽이(Chrysomallon squamiferum)다. 인도양의 수심 2900m에 있는 열수분출구에 사는 비늘발달팽이는 미국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서 칼이 꽂혀 있는 왕좌처럼 껍질 아래에 쇳조각이 박혀 있는 모습이다. 달팽이는 철과 황화물을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독성 황화물을 해독하면서 동시에 경쟁자나 천적을 물리치는 갑옷을 만든다.

하지만 철갑을 두른 달팽이라도 인간을 이기지 못한다. 일본과 아일랜드 연구진은 2019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에 비늘발달팽이가 심해 광물 채굴로 멸종 위기에 몰려 보호 대책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2019년 “비늘발달팽이가 심해 광물 채굴로 인해 멸종 위기에 내몰린 최초의 동물”이라고 발표했다.

비늘발달팽이는 2003년 인도양의 열수분출구 일대에서 처음 발견됐다. 갑옷을 두르고도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열수분출구 주변에 경제적 가치가 큰 구리와 철·납·아연·금· 은 등의 광물이 황과 결합한 상태로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광물을 녹인 물이 열수구로 분출돼 식으면 광물이 주변에침전돼 채굴 가능한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바닷속 4000m 해저 평원에는 감자 크기의 금속 단괴(團塊)가 깔려있다. 단괴에는 구리와 니켈, 망간이 많다. 산처럼 솟은 해산(海山)은 코발트가 풍부한 지각으로 덮여 있다.

지금까지 인도양에서 비늘발달팽이 서식지 세 곳이 발견됐다. 이 중 두 곳에서 심해 광물 채굴이 공식 허가를 받았다. 광물을 채굴하느라 바다 밑바닥을 헤집으면 비늘발달팽이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비늘발달팽이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엔은 심해저를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고 밝혔다. 눈앞의 광물보다 대대손손 물려줄 인류의 유산을 지켜줄 기사(騎士)는 어디 있을까.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