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76>] 사랑과 의무 사이, 자식의 외줄타기: 부모 봉양의 심리학

몇 년 전 늦가을 오후, 대학병원 긴 복도에서 휠체어를 밀고 가던 한 여성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눈에 남아 있다. 복도 창가로 떨어지는 햇살은 금빛 물결처럼 부드러웠지만, 반백의 머리에 초로인 그녀의 어깨는 유난히 처져 있었고 발걸음마저 물에 젖은 낙엽처럼 무거웠다. 나는 멈춰서서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석양빛에 물든 그녀의 그림자 뒤에는 ‘부모 봉양’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묵직한, 또 하나의 그림자가 겹치고 있었다.
한때 효(孝)는 한국 사회에서 빛나는 미덕 중 하나였다. 부모를 모시는 일은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자, 가족의 자랑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효자·효녀 이야기’는 봄날의 꽃처럼 늘 훈훈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 봉양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더 이상 따뜻한 감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의 굴레가 안개처럼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우선 우리는 시대가 달라졌음을 직시해야 한다. 의료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경제성장은 인류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기대수명이 바로 그것이다. 부모 세대가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이 자녀 세대에게는 때로 감당하기 버거운 십자가로 다가온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70대의 큰 고민 중 하나가 90대 이상의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제 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자녀가 30~40대에 부모를 봉양하며 자기 노후를 준비할 시간이 넉넉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듯 순환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 수명이 늘어나면서 자녀가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은퇴한 후에도 부모를 돌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저출산으로 형제자매가 적어, 한두 명의 자녀가 모든 부담을 떠안는 일이 흔하다. 부모를 돌보는 일이 더 이상 ‘잠시의 희생’이 아니라, 긴 겨울을 견디듯 수십 년에 걸친 ‘장기 과제’가 되는 셈이다.
50대 후반의 K씨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10년 넘게 90대 중반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어머니는 뇌졸중과 치매를 동시에 앓고 있다.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도움이 필요하다. “어머니가 잠들지 않는 밤이면, 나도 함께 뜬눈으로 별을 헤아리곤 한다.” 담담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달빛처럼 묻어 있었다. 한때 세계 일주를 꿈꾸며 활기찬 은퇴 생활을 상상하던 그녀였지만, 어머니 병환과 함께 그 모든 꿈은 가을 단풍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향한 깊은 애정과 ‘나는 언제쯤 내 인생의 봄날을 맞을 수 있을까’ 라는 절망감이 그녀 마음속에서 폭풍우처럼 뒤엉킨다. 심리학자가 말하는 ‘돌보기 부담(caregiver burden)’의 전형적 사례다. 돌보기 부담이란 장기간 노인·장애인·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신체적·정신적·경제적·사회적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느끼는 총체적 부담을 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그녀는 자신조차 잃어가고 있다.
부모 봉양, 가족 내 문제로만 치부하면 안 돼
사회심리학의 ‘역할 긴장 이론(Role Strain Theory)’은 하나의 역할이 과도하게 요구될 때 개인의 자아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설명한다. K씨는 효녀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두 개의 상충하는 역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 욕구와 자식으로서 의무 사이에서, 두 개의 별자리를 동시에 좇듯 끊임없이 갈등한다.
대기업 부장 P씨의 하루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의 학원비, 70대 후반 부모의 병원비와 생활비, 주택 담보대출 상환금까지. 월급은 강물처럼 들어오는 순간 어디로 흘러갈지 이미 정해져 있다. “내 노후는 아득한 수평선처럼 생각할 겨를도 없다.” 자녀를 양육하며 동시에 고령의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P씨가 속한 세대는 흔히 ‘샌드위치 세대’라 불린다. 심리학자 도로시 밀러(Dorothy Miller)는 이들의 특성을 ‘다중역할갈등(Multiple Role Conflict)’으로 설명한다.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압박은 심신을 시들게 하고, 자기 미래를 설계할 여유를 메마른 땅처럼 앗아간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이 반복되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결국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으로 이어질 수 있다. P씨는 매달 빠듯한 가계부를 보며 점점 자신감과 희망을 일몰처럼 잃어가고 있다. 부모 봉양과 자녀 교육이라는 두 산을 아틀라스처럼 짊어진 그의 어깨가 왜 무거울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0대 후반의 S씨, J씨 부부에게 찾아온 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S씨의 친정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낙상 사고로 퇴원 후 돌봄이 필요해지자, 부부는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됐다. “내 부모인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 있나”는 S씨의 간절함. “우리 가족도 중요하지 않나”는 J씨의 현실적 고민. 두 사람 모두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사이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S씨는 ‘효도하는 딸’과 ‘좋은 아내’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심리적 긴장을 겪고 있다. J씨 또한 아내를 사랑하지만, ‘남의 부모 봉양’ 에 대한 부담을 느끼며 갈등한다. 더구나 배우자 부모가 친혈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판 남도 아니라는 사실이 두 사람을 더욱 안갯속으로 몰아넣는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가시처럼 깊어지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의 역설이 이 부부의 현실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부모 봉양은 더 이상 한 개인이나 가족의 윤리와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길어진 기대수명의 그늘 아래에는 소진돼 가는 자녀의 마음, 해체 위기에 놓인 가족의 아픔이 석양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낡은 ‘효’의 개념을 넘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랑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John Bowlby)는 건강한 관계를 ‘상호 의존’이 아닌 ‘안전한 애착’으로 정의했다. 부모와 자녀 모두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매이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정서적 유대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과 애착의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한 개인의 어깨로만 노부모의 무거운 돌봄을 짊어지게 하는 구조는 단기적으로는 효의 미덕으로 포장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돌봄 부담이 결혼과 출산의 장애물이 될 때 저출산과 고령화는 더 가속화하고, 이는 노동력 감소와 복지 재원 취약화, 세대 간 연대 약화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부모 봉양 문제는 가족 내부의 윤리적 과제를 넘어 우리 사회와 인류 전체의 생존을 좌우하는 구조적 과제인 것이다.
봉양 무게 분산하는 사회적 연대·체계 필요
이런 이유로 돌봄을 가족의 사적 문제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질 높은 공공 돌봄, 유연한 노동 제도, 보육·육아·요양에 대한 실질적 지원, 돌봄 노동자 처우 개선 등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이자 인류 미래를 지키는 사회적 선택이다. 이러한 사회 안전망이 촘촘한 그물처럼 구축될 때, 사람은 결혼과 출산을 자기 인생 계획에 담을 여유를 갖게 되고, 부모 봉양 또한 한 개인의 희생이 아닌 공동체의 연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 부모 봉양은 서로 얽혀 있는 한 덩어리이며 이를 풀어내는 실마리는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체계에 있다. 지금은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존엄과 생존을 위해 공공의 안전망을 세울 때다. 그럴 때 비로소 모든 세대가 각자 삶을 존중받으며 함께 행복한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미래가 가능해질 것이다. 늦가을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그 여성의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길은 개인의 눈물을 닦는 차원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짐이 아니라 날개여야 하고, 의무는 족쇄가 아니라 연대의 끈이어야 하며, 봉양은 희생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아름다운 순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