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팬티 입고 웃통 벗은 디오니소스 “기존 신화에 반기”

고승희 2025. 10. 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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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다룬 5부작 ‘안트로폴리스’
12·3 비상계엄 패러디하고 1인 18역 연기
그리스 신화의 재조명…내용은 쉽게
그리스 신화 다룬 5부작 ‘안트로폴리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 [국립극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상반신을 노출하고 빨간 팬티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 굵게 땋은 드레드 스타일의 신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과장되고 어눌한 몸짓으로 등장한다. 인간의 오만을 일깨우는 신화가 무대로 향하자, 연극은 B급 코드로 똘똘 뭉쳐 ‘신화’를 뒤집어엎었다. 그리스 신화 속 테베 왕가의 비극을 다룬 5부작 연극 ‘안트로폴리스 Ⅰ-프롤로그, 디오니소스’다.

작품을 연출한 윤한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는 “서양과 달리 우리에겐 신화가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며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B급 코드를 가미했다”고 16일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국립극단의 올 하반기 대기획인 ‘안트로폴리스’ 5부작은 독일 출신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희곡으로, 지난 2023년 현지에서 초연했다. 장시 독일에선 바그너의 ‘링 사이클’처럼 이 작품을 3일간 마라톤 상연을 해 주목받았다.

국립극단은 쉼멜페니히의 희곡을 가져와 릴레이 무대를 기획했다. 이달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를 공연하며, 다음 달 6∼22일 같은 장소에서 2부 ‘라이오스’가 올라간다. 3∼5부는 내년으로 예정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 다룬 5부작 ‘안트로폴리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 [국립극단 제공]

‘프롤로그/디오니소스’는 인터미션을 포함해 장장 185분에 달하는 긴 연극이다. 인간과 신이 공존하던 시대, 제우스의 종족 번식과 디오니소스 탄생 서사를 요약한 ‘프롤로그’와 본격적인 디오니소스 시대를 담은 이야기가 어우러졌다.

윤한솔 연출가는 “‘프롤로그’에서는 테베 건국 신화를 소개하고 현대 문명이 전파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며 “‘디오니소스’에서는 디오니소스라는 신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기존 구 세력과 대립하는 과정을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방대한 분량에도 18명의 배우가 춤추고 노래하는 1부, 우스꽝스러운 B급 유머로 버무린 2부가 적절히 어우러져 연극은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2부에서 펜테우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을 잡아들이라 명령하는 장면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언을 연상시킨다. 연극 곳곳에서 영상이 활용되는데, 상당히 기발하다. 예컨대 펜테우스가 극 중에서 ‘테베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히는 모습을 뉴스 속보 영상으로 대형 스크린에 띄우는 식이다.

그리스 신화 다룬 5부작 ‘안트로폴리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 연출을 맡은 윤한솔(오른쪽), 2부 연출을 맡은 김수정 [국립극단 제공]

윤 연출은 “계엄 선언 영상은 제작 초기부터 제작진이 떠올린 장면이었다”며 “연극이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느끼는 현재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안트로폴리스’의 2부 격인 ‘라이오스’는 테베의 라이오스 왕이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살해당하는 과정을 담은 1인극이다. 배우 전혜진이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와 18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연극은 라이오스의 욕망을 따라가며 왜 오이디푸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 역시 ‘쉽고 재밌는 신화’를 목표로 삼았다. 김수정 연출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작품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었다”며 “기존 신화에 반기를 드는 발칙한 작품이다. ‘쉽고 재밌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김 연출은 10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전혜진에 대해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낯설고도 익숙했던 신화의 세계는 한국의 연극 무대를 통해 새로운 옷을 입는다. 두 연출가는 ‘안트로폴리스’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2025년 한국’에서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작품 곳곳에 담아냈다.

윤 연출은 “우리 사회에서 비극적 상황이 닥쳤을 때 사건을 한 걸음 다가가서 들여다보지 않고 곧바로 화해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목격한다”며 “상처를 치유라는 말로 덮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날카롭고 투명하게 렌즈를 갈아서 그것으로 상처를 들여다보려 했다”고 말했다.

김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해 비극과 폭력이 왜 계속되고 있는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를 끊어낼 수 있는지, 바람직한 통치자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같이 던지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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