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88. 우암(尤菴)의 서안을 보며
“엉성한 듯 결구된 구조의 조촐한 모양이 오히려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꾸며진 그 어 떠한 국보, 보물급의 서안들보다 고결하고 드높은 정신이 드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

깜짝 놀랐다.
물건의 특이한 생김새에 놀랐고 그것을 사용한 이가 다름 아닌 우암 송시열(宋時烈)이었기 때문에 곱으로 놀랐다. 우암이 누구인가. 조선의 17대 임금 효종(孝宗)이 세자(봉림대군) 시절부터 사부로 임명되어 주역 서경을 강의하는 등 ‘서로 떨어져서 살 수 없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는 어수지계(魚水之契) 사이가 아니었던가. 자연히 임금과 극히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독대는 기본이요 봉사(封事·국왕에게 올리는 글로, 밀봉을 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 내용을 사전에 볼 수 없음)를 올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당했던 치욕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함께 벼리었던, 조선 중기 성리학의 맹주가 아니었던가.
학문과 생각의 심지가 한 차원 높으면 이처럼 상선약수(上善若水)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가 저절로 발현되는 것일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 그것도 맨 꼭대기에 있던 이가 사용한 서안(書案·과거 시절의 책상)이 이렇게 소박하다니! 염소수염에 쭈그러진 탕건을 한 벽촌의 촌학구(村學究·시골의 훈장)의 무릎 앞에서나 어울릴 서안처럼 보이는데, 안 그런가? 설명을 하자니 도무지 요령부득이요 서부진 화부득(書不盡 畵不得·글로써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음)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보면 볼수록 햇살같이, 잔물결같이 가슴에 스며드는 느낌이 따뜻하다. 엉성한 듯 결구된 구조의 조촐한 모양이 오히려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꾸며진 그 어떠한 국보, 보물급의 서안들보다 고결하고 드높은 정신이 드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세상에 나온 물건에는 모두 그것을 사용한 사람의 마음의 지문이 새겨진다고 믿어서일까. 갑자기 서안에도 제각기 온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본다면 분명히 이 서안은 36.5℃다! 그래서 부끄러워지고 조심스러워지고 고마운 마음이 드나 보다.
틀린 예측일 수 있지만, 서안 상판의 나뭇결을 보니 소나무 같다. 말이 필요 없게 생명력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저력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가 소나무이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꿋꿋이 자라는 모습이 듬직하여 믿음이 가고, 멋을 부리지 않고 자랐음에도 멋있으며 치장이 없음에도 궁해 보이지 않는 나무. 언뜻 반신 영정으로 그려진, 학창의를 입은 우암의 얼굴과 몸피가 떠오른다. 한국 소나무와 우암 송시열. 고담(枯淡)한 야취(野趣)와 수수한 활기, 정중하고 고결하고 근엄한 인상이 분명히 서로 닮았다. ‘우암 서안’이란 이름의 설명문은 이렇다.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 암서재(巖棲齋)에서 책을 읽을 때 쓰던 서안이다. 우암의 깊은 사유와 수많은 저술이 이 서안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후학은 더욱 학문의 길에 분촌(分寸)을 아껴가며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함을 느낄 수 있다. 서안의 네 면이 오목하게 패인 것은 책장을 넘길 때 책이 상하지 않도록 한 배려라고 한다. 학자의 책을 아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질박하게 만들어진 서안에서 학자의 검소한 생활을 그려볼 수 있다.”(‘화양서원, 만동묘’ 국립청주박물관, 2011에서 인용)

화양동은 지금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우암이 60세 무렵 평소 ‘선경(仙境)’이라 여겼던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뒤 말년에 이르기까지 은거지로 삼았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화양구곡으로 발전하지만, 우암 생전에는 5칸의 초당을 지어 조촐하게 기거했다고 한다. 초당 안의 노학자, 그리고 그 노학자 앞에 놓인 이 소박한 모양의 서안. 그것처럼 세상에 잘 어울리는 게 또 어디 있을까. ‘산림경제’에 “후원으로 통하는 문은 작아야 좋다”고 했다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알 듯하다.
오래전부터 우암이 남긴 먹글씨 ‘각고(刻苦)’를 좋아했다.
큰 붓에 단 한 번 먹물을 묻힌 뒤 무심의 경지에서 누르며 끌듯이 써 비백(飛白)의 멋이 듬뿍 담긴 글씨이다. 좌우 그리고 하단에 우암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유명뢰의 발문이 더해져 품위를 더했다. 우암이 평생 흠모했던 주자(朱子)가 특히 강조했던 문구, 즉 근근(勤謹·부지런하고 삼감)과 견고각고(堅固刻苦·뜻을 굳게 갖고 열심히 노력함)에서 인용한 문구인데, 우암은 늘 학문을 닦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이 여섯 글자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 좋은 말이 어디 학인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마땅히 세상 모든 이들이 본받아야 할 금언이다. 마음이 9월의 낮달처럼 하얗게 닦이는 것 같다. 서양화가
#노학자 #송시열 #소나무 #화양동 #생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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