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상사'가 인도하는 1997년,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드라마 쪼개보기]

아이즈 ize 조이음(칼럼니스트) 2025. 10. 1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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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위로로 흥행 태풍 일으키나? 첫 방송 후 대박예감

아이즈 ize 조이음(칼럼니스트)

사진='태풍상사' 방송 영상 캡처

동대문 운동장으로 안내하는 도로 표지판을 배경으로 '나는 문제 없어'가 흘러나온다. 투박한 CRT 모니터, 울리는 삐삐에 공중전화로 달려가고, 그런 친구에게 자랑하듯 내미는 씨티폰 까지. 지난주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태풍상사'는 단 두 회 만에 우리를 1997년으로 데려갔다. 단순한 복고의 향취가 아니다. 마치 오래된 서랍 속에 묻어둔 사진첩을 꺼내 펼쳤을 때 스며드는 묵은 먼지 냄새처럼, 그 시절의 공기까지 되살려낸다.

MF 외환위기. 누군가에겐 역사책 속 단어일지 모르지만, 그 시대를 통과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상처로 남아 있다.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극본 장현, 연출 이나정 김동휘)는 IMF 한파로 부도 위기에 놓인 중소기업 태풍상사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씨름하는 청년 강태풍(이준호)의 분투를 그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특별한 건, 위기 자체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차가운 계절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이유다.

이준호가 연기하는 강태풍은 명품 셔츠를 걸치고 클럽을 누비는 오렌지족 X세대다. 하지만 불량스러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꼿을 사랑하는 남자. 언젠가 자신이 피워낸 국산 장미를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꿈을 품은 청년이기도 하다. 날나리라 불리던 그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26년간 이어온 회사를 떠안게 된다. 풍요와 유흥의 시대를 살던 청년이 이제는 부도 직전의 회사를 이끌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직원들과 다시 꿈을 피워내야 한다.

사진='태풍상사' 방송 영상 캡처

김민하가 연기하는 오미선은 강태풍과는 정반대의 결을 지닌 인물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두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대학 문턱 앞에서 제 꿈을 미뤄둔 채 태풍상사에 입사한 경리 사원. 현실적이고 영리한 성격 덕분에 사장의 신임을 얻어 회사의 자금줄을 쥐고 있다. 누구보다 냉철하지만, 그 단단함 속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이 숨어 있다.

강태풍과 오미선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절실하고 현실적인 연대의 시작이다. 회사 일엔 관심조차 없던 사장의 아들이자 기본적인 단어조차 낯설기만 한 초보 사원과 영리한 경리 사원이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관계는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하다. 첫 회 말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태풍과 차갑게 돌아서면서도 흔들리는 미선의 눈빛은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진정성을 드러낸다. 두 인물이 앞으로 마주할 변화는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일 것이다.

1997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유는 그 시절의 사람들과 오늘의 우리가 닮았기 때문이다. 회사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내일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 그럼에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것은 1997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감정이기도 하다.

사진='태풍상사' 방송 영상 캡처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태풍상사 직원들의 태도다. 하루아침에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월급마저 밀린 암담한 상황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그렇다고 그들이 태풍상사를 지키겠다며 대의를 품고 뭉친 영웅은 아니다. 다만 각자의 사정으로 떠날 수 없거나, 떠나고 싶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갑갑한 현실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결국 한 공간에 남아 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가족'의 형태를 본다. 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함께 버티며 웃고 우는 이들도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이 드라마는 첫 방송부터 5.9%(닐슨 코리아 제공, 전국 기준, 이하 동일)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올해 tvN 토일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로 출발했다. 2회는 6.8%로 상승하며 흥행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드라마가 세대를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는 데에 있다. IMF를 겪은 세대에게는 위로를, 그 시절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공감을 건넨다.

사진='태풍상사' 방송 영상 캡처

결국 '태풍상사'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을 밀어내며 살아남는 냉혹한 존립이 아니다. '정(情)'이라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온기로 버티는 생존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사람은 남는다는 오래된 진리를, 이 드라마는 1997년이라는 시간 속에 담아낸다.

태풍이라는 이름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위기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의 힘이다. 앞으로 이어질 14회의 여정 속에서 어떤 파도가 태풍과 미선을, 그리고 태풍상사를 덮쳐올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배는 분명 끝까지 항해할 것이다. 오늘은 없어도 내일은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조이음(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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