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30년 전 삼성·대우는 화웨이·BYD만큼 무서웠다

이인열 기자 2025. 10. 1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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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실패 불사로 미래 열고
지금은 실패 회피로 미래 닫아
중국의 추월보다 무서운 건
스스로 성공 방정식 잊는 것이다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맨 오른쪽) 삼성그룹 창업자와 이건희(오른쪽에서 둘째)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88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현장을 자전거로 다니는 모습.

“지금 화웨이나 BYD의 모습은 정확히 20년, 30년 전의 삼성이고 대우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국 기업 관계자가 “중국 첨단 기업들의 급성장이 무섭다”는 말에 이렇게 응답했다. 명운을 건 대규모 투자, 실패를 불사하는 저돌성, 목표를 위한 집요함에 대한 얘기였다. 이 말의 진짜 핵심은 ‘그들이 우리를 닮았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더 이상 이전의 우리를 닮지 않았다’는 데 있다. 중국이 우리의 성공 방정식을 활용해 미래로 달려가는데, 정작 우리는 그 유산의 첫 장마저 잊어버리고 있다.

창업 세대는 사라지고, 대체할 세대는 안 보인다. 한 대기업 블라인드에는 “예전엔 우리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경영진이 위기라고 닦달했는데, 이젠 우리가 위기라고 하는데 경영진이 괜찮다고 한다”는 글이 떠 있다. 리스크를 감수하며 새 영토를 개척하던 야성(野性)이 사라지는 징조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성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된 조직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가 가졌던 그 ‘야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1974년 삼성전자는 이런 신문 광고를 냈다. “삼성 TV는 3가지가 다릅니다.” 그 3가지는 ‘고장 없는 TV’, ‘브라운관 수명 10년’, ‘반영구 채널’이었다. 지금 보면 ‘고장 없다면서 수명은 10년이고, 영구도 아닌 반영구라니’ 하며 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기술에 모든 걸 건다는 집념이다. 광고 귀퉁이에는 ‘총 검사 시간 2460시간’, ‘10만회전에도 고장 없는 채널’ 같은 빼곡한 데이터가 그때의 몸부림을 증명하고 있다. 그해, 이건희 당시 이사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9년 후 삼성이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에 모든 걸 베팅했을 때, 그것은 MBA(경영전문대학원) 교과서에 나오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세대 전, 우리가 가졌던 기업가 정신의 본질이다.

우리를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1990년대 일본을 향해 휘둘렀던 그 추격의 칼을, 이제 중국이 우리를 향해 겨누고 있다. 반면 우리는 우리가 타도하려 했던, 느리고 방심한 기득권 국가의 모습을 어느새 닮아 있다.

우리 앞에는 저출생과 고령화, 반도체 위기, 미·중 기술 전쟁 같은 거대한 도전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진짜 위기는 외부에 있지 않다. 불가능에 도전하던 야성을 잃고,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우리 내부가 진원지다. 여기에 쏟아지는 정치권의 규제는 ‘도전하지 않아도 될 명분’마저 쥐여주며 야성의 실종을 부추긴다.

우리는 맨주먹 시절의 절박감으로 돌아가 제트기의 엔진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비행체를 만들 상상을 해야 한다. 중국과 실리콘밸리가 ‘빠른 실패(Fail Fast)’를 혁신 동력으로 삼는 동안,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골몰했던 건 아닌가.

한국 경제의 위기는 경제 지표에 있지 않다. 도전을 잊고 관리에 몰두하는 리더십,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 그리하여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모험하지 않으려는 ‘귀족적 타성’이 만연하는 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1983년 진흙탕 위에서 반도체 공장을 지으며 미래를 꿈꾸던 그 야성의 피는 어디로 증발했는가. 우리의 과거를 복제한 도전자에게 미래를 통째로 내어줄 것인가. 과거의 야성을 깨울지, 역사의 유물로 남을지, 그 선택의 대가는 후세들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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