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발턴, 자임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스피박 스캔들.” 한겨레21 제1581호에서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은 인도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의 한국 방문을 둘러싼 과열된 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가히 ‘스캔들’이라 부를 만한 이 사건은 ‘스피박 논쟁’이기보다 한국의 지식장, 즉 우리 사회의 지식 생산과 소통 구조에 대한 또 하나의 캐리커처에 가까웠다.
박동수 편집장의 글에 이어 나는 스피박이 한국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소개하려고 한다. 이는 “왜 스피박을 불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 답변이기도 하다. 나는 스피박을 초청한 비판적섬이론학회를 공동주최한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소속으로, 그의 한국 체류 열흘 동안 가까이에서 일정을 함께했다.(이 글을 읽을 때 ‘필자의 위치’를 예민하게 인식하기를 바란다.)
초대자 위치에서 지켜본 스피박 강연
스피박은 “서발턴(하위 주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8년 출간된 동명의 논문은 유럽의 남성 철학자인 푸코와 들뢰즈를 비판하며 시작된다. 그들은 한 대담에서 노동자들이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알고 있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박은 이를, 서발턴을 대신해 말할 수 있다고 자임하는 “좌파 지식인들의 복화술”이라고 꼬집는다. 이런 낭만화는 남반구의 서발턴, 특히 전지구화, 금융 자본주의, 노동분업, 가부장제 등 중첩된 구조적 폭력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남반구 여성이 직면한 억압과 침묵의 상황을 간과한다.

스피박에게 서발턴이란 고정된 정체성도, 단순히 ‘말할 수 없는 자’도 아니다. 서발턴은 오히려 말하고 있음에도 그 말이 들리지 않거나, 들리더라도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혹은 해석의 권력을 쥔 자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는 자리에 놓인 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말함’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한다’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한 사회·정치·경제적 조건을 분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렇게 되묻는다. “우리 지식인은 들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후 서발턴 연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스피박은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정전의 자리에 올라선 남성 철학자들과 주류 페미니즘의 모순과 제대로 붙으면서 ‘글로벌’ 지식장의 거장이 됐다. 그리고 전지구화(Globality)라는 현실과 협상하고 갈등하면서 철학자로서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1990년대 말, 그는 다시 한번 지식장을 흔드는 요청을 던진다. ‘행성성’(Planetarity)을 사유하자는 것이었다.
행성성이란 무엇일까? 스피박은 ‘지구본’(Globe)과 ‘지구 행성’(Planet)을 구분한다. 이때 지구본이란 자본이 추동하는 전지구화 속에서 정보기술과 지리정보시스템(GIS)의 좌표망에 포획되어 추상적이고 가상적으로 관리되는 세계를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구’를 떠올릴 때 그리는 이미지, 곧 무한히 개발·착취 가능하며 수치화된 대상이다. 반면 ‘지구 행성’은 인간이 거주하고 있되 인간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은 세계다. 그것은 인간의 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불가해한 타자성의 영역이며,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공간’으로서의 지구다.
본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섬-의식을 개발하라
‘지구 행성’에 대한 인식은 21세기 들어 ‘인류세’ 담론과 만난다. 인간이 지구 행성을 불가역적으로 손상하고 있고, 그 결과가 6대 멸종으로 이어진다는 그 긴급한 깨달음 말이다. 동시에 행성성은 ‘군도적 관점’이라는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2025년 8월 제주대에서 열린 비판적섬이론학회의 국제학술대회 ‘군도적 전환과 다른 아시아들’에서 스피박을 기조강연자로 초청한 이유다.
군도적 관점 역시 북반구의 제국주의자들이 남반구를 식민지화하면서 이른바 ‘세계지도’를 제작했던, 그 ‘지구본’의 세계관에 저항한다. 범박한 예로 제국의 탐험가들이 태평양을 ‘발견’했다고 떠들며 함부로 갖다 붙인 이름들을 보자. 마셜제도, 샌드위치섬, 뉴칼레도니아, 캐롤라인제도, 베링해 등. 태평양의 지도 제작은 유럽인들의 나르시시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가 지나갔으니 내 이름을 붙인다”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그 바다와 섬의 선주민이 사용하던 고유한 이름은 멸종당했다.
‘군도’란 제국주의자가 스스로를 대륙, 즉 ‘본토’(Mainland)라 천명했던 대륙 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 관점을 해양으로 이동시키고, 침탈과 확장을 문명의 가치로 이해했던 세계관을 뒤집으려는 인식론이다. 여기서 ‘섬’은 봉쇄되거나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교통의 공간으로서 지구 행성의 혼종성을 발견하는 장소가 된다.
스피박은 ‘행성성 팔기’(Selling Planetarity)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에서 행성성과 군도를 연결하면서, 지구 행성은 어떠한 표식도 갖지 않지만 근대국가는 ‘국경’이라는 허구적이고 폭력적인 경계를 그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구 행성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가 섬 주민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유럽이나 미국은 스스로를 대륙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모두가 섬 주민이라는 세계의 현실과 접속하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렇게 요청한다. “섬-의식을 개발하라. 본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강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언을 건넸다. 이제 강연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팔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이중 구속’

그는 ‘행성성 팔기’라는 제목이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호텐스 스필러스의 “저항이 교과 과정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섬과 군도에 대한 열광” 역시 교과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새롭고, 더 자극적이며, 더 급진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려고 고군분투하는 연구자들은, 그들 자신이 이미 제도와 공모하고 있으며, 그 안에 얽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스피박은 여기에서 학회가 야심 차게 표방한 ‘군도’라는 관점, ‘아시아’라는 방법론이 또 하나의 트렌디한 이론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셈이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헤게모니를 누리고, 다시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며 연구자들은 “반복적으로 자기 이론이 지식 생산에 가장 적합하다는 확언과 증거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어떤 재료를 ‘지식’으로 조직하려면 많은 우연성이 희생돼야 한다”. 연구자가 자랑하는 어떤 방법론도 “(연구를 성사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뤄지는) 통제의 이익을 위해 현실을 도둑질하고 만다”.
그리고 연구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강력한 실천’으로 이어가기 위해 ‘마케팅’ 모델을 활용해야만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 구속이다. 인문학은 편재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개인의 욕망을 재배치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발명해야 하고, 마케팅이야말로 “사람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거슬러 원하게 만드는 모델”이다. 더욱이 그런 인문학의 지속을 위해서는 “장학금이나 재정 지원 같은 가격 유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연구자들은 인문학의 소명을 위해 인문학을 상품화하는 ‘장사치’가 돼야 한다.
스피박은 당신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고백을 이어갔다. 행성성을 처음 소개했던 ‘경계선 넘기’는 “철저히 제도화되고 규율화된 글쓰기”였으며, 행성을 다언어주의·다문화주의로 환원함으로써 오히려 지구본에 통합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나 자신은 하나의 징후에 불과했다”고.
기조강연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행성성은 그 무엇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여러분이 숙고하기를 바랍니다. 지배는 끊임없이 ‘저항’을 ‘대안’으로, 다시 ‘억압적 관용’으로 바꿔버리죠. 행성은 저항이나 지지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스스로를 ‘포기하는 행위’ 속에서 발견하는 법을 배워주십시오”.
‘우리’는 ‘스피박 스캔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여러 답이 제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답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서발턴 거부한 강정마을 운동가들에게서 배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많은 ‘지식인’이 스스로 ‘대한민국이라는 변방의 서발턴’임을 자임하며 그 자리로 걸어 들어갈 때, 기어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에게 필요한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며 서발턴의 자리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스피박 기조강연 현장을 찾은 강정마을 반기지 평화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스피박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책을 함께 읽으며 세미나를 열고 강연 참석을 준비했다. 통역이 없는 현장에서는 인공지능(AI) 번역 툴을 활용해 강연을 들었고, 강연 후에는 스피박에게 강정 문제를 알리며 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도 강정의 투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들이 군산언복합체(군사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언론)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서발턴의 자리를 강요받았지만,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스피박은 서발턴이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가 오랜 시간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가는 페다고지(교수법)를 개발해온 이유이자, 인도 벵골에서 초등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다. 스피박의 페다고지는 그의 강연을 확장한 강정 평화운동가들을 통해 한국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나는 스피박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웠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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