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되려면 ‘팀플레이어’ 증명하라”…진짜 의사를 만드는 수업

" 간호사가 의사의 의견에 언제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실제 매일 그렇게 한다."
런던 로열프리병원에서 혈관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준 교수가 소개한 의료진 회의 모습이다. 조 교수는 "병원 내에선 위계질서에 따른 권위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감히 의사에게?'라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열프리병원은 영국 명문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의대의 주요 교육 병원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병원 실습을 통해 팀으로 일하며 동료를 존중하는 의료진의 생각과 태도를 배우게 된다.
영국에서 '좋은 의사'가 되는 과정은 단순히 의학 지식을 머리에 채우는 것이 아니다. 의대 입학 면접부터 전문의가 되고 환자를 볼 때까지 '나는 훌륭한 팀 플레이어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영국 의료 시스템에선 의사가 독립적인 전문가가 아니라 간호사와 물리치료사, 약사 등이 모두 포함된 의료팀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팀 내 소통과 협업 능력이 환자 안전과 직결된다는 철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팀워크 경험을 말해보시오"…英 의대 면접, 첫 질문부터 다르다
영국에서 의대는 단순히 최고 성적을 받았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팀워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 하면 선발되지 않는다. 런던에서 일반의(GP)로 활동 중인 이민호 재영한인의사협회(KUMA) 사무총장은 "영국에서 의대를 목표로 한다면 자기소개서에 병원 실습 등 실제 의료 현장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를 반드시 녹여내야 한다"며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팀워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학생은 선발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면접에서도 팀워크 경험에 대한 질문이 단골로 등장한다. 단순히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을 넘어, 병원 봉사나 스포츠팀 활동 같은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협력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의사가 결코 혼자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입학 단계부터 명확히 한다.
특히 면접은 합격을 좌우하는 핵심 과정이다. 통상 3~5명의 면접관이 지원자 한 명을 30~45분간 심층 평가한다. 주목할 점은 면접관의 구성이다. 의대 교수진은 물론, 재학생 대표나 지역 사회 의료 관계자까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학문적, 실무적, 동료적 관점을 모두 반영하는 다면 평가로 진행되는 것이다. 성적만 믿고 면접장에 들어갔다간 대답을 못해 쩔쩔매기 십상이다.
"의사는 간호사와 물리치료사의 역할 알아야" 팀 내 소통법 교육이 핵심
영국의 명문 의대인 킹스칼리지런던에서는 의대 1학년부터 실습을 시킨다. 1학년은 월 1회, 2학년은 월 2회로 빈도가 늘어간다. 실습은 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함께 한다. 병원에서 진료과를 지정해주면 하루 종일 해당 부서에 머무르며 환자를 대하는 법, 환자와의 소통법, 병원 운영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교육 과정에서도 역시 팀워크와 소통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이 사무총장은 킹스칼리지런던에서 교육 펠로(한국의 조교수)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간호사와 물리치료사 등 병원에서 일하는 인력들은 모두 각자 분야의 동등한 전문가로 인정 받는다"며 "의대생들은 병원 실습을 통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의대 입학부터 시작된 팀워크 중심 교육은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까지 이어진다. 의사들의 면허를 관리하는 영국의사협의회(GMC)는 의대생이 졸업 시 갖춰야 할 필수 역량 중 하나로 '동료와의 협업'을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을 정도다.
"감히 의사에게?" 없는 병원…수평적 소통이 환자 안전 지킨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영국의 의료 철학은 의사가 된 후 임상 현장에서 '다학제 진료(MDT·Multi-Disciplinary Team)'라는 시스템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다학제 진료란 한 명의 환자를 위해 여러 과 전문의는 물론 간호사, 약사, 물리치료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팀을 이뤄 최적의 치료법을 찾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일부 대형병원의 암 환자 진료를 중심으로 도입되는 추세지만 영국에서는 이미 의료 현장의 보편적인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환자 안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조 교수는 "항상 화를 내는 권위적인 교수라면 간호사가 환자의 미묘한 상태 변화를 보고했을 때 별일 아니라고 묵살할 수 있다"며 "그런 경험을 한 간호사는 정말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보고하기 전에 망설이게 되고 그 짧은 망설임이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철학은 후배를 교육할 때도 그대로 반영된다. 조 교수는 "모든 레지던트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은 '확실하지 않으면 무조건 물어보라'는 것"이라며 "새벽 2시에 전화를 해서 깨우는 게 혼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행정직원까지 평가에 참여…"리더십·소통 능력 부족하면 성장 불가"
소통과 팀워크는 레지던트의 성장과 탈락을 가르는 냉엄한 평가 잣대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다면 평가(Multi-Source Feedback)'가 있다. 레지던트들은 매년 순환 근무가 끝날 때마다 지도교수는 물론 동료 의사, 간호사, 병동 행정 직원, 자원봉사자까지 최소 10명에게 '나는 좋은 팀 플레이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아야 한다. 평가 항목도 '환자와의 관계', '구두 소통 기술', '팀워크' 등 임상 실력 외에도 협업 역량을 집중적으로 검증한다. 팀워크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진급이 보류되거나 추가 수련을 받는 등 매우 엄격한 결과가 뒤따른다.
박세정 재영한인의사협회(KUMA) 회장(마취과 전공의)은 "다면 평가 기록들이 모여 다음 단계 진급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실력 외에도 인성과 소통 능력이 없으면 절대 성장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내 식구 챙기기' 없는 영국…"최고의 스승은 다양한 현장"
영국 의료계에 권위주의 문화가 뿌리내리기 힘든 데에는 다른 구조적 비밀도 있다. 바로 의사들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게 만드는 '순환 근무' 시스템이다. 인턴은 2년간 서너 달에 한 번씩, 레지던트는 수련 기간에 최소 두 곳 이상의 병원으로 소속을 옮긴다. 소속 병원이 계속 바뀌다 보니 특정 대학 출신이 병원 내 주도권을 잡거나, 출신 배경이 엘리트 의식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파벌 자체가 생기기 힘든 환경인 것이다.
또 이런 '유목민' 생활은 역설적으로 의사의 임상 역량을 높이는 경험이 될 수 있다. 1차 의료 현장의 문턱을 넘는 환자부터 3차 병원의 중증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군과 의료 시스템을 두루 겪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같은 질병이라도 환자의 연령이나 지역 특성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져야 함을 현장에서 배울 수 있다. 조 교수는 "다양한 치료법을 직접 보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공부"라며 "경험이 쌓이면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어떻게 치료하면 안 되는지도 배울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시리즈 3-2로 이어집니다)
⋅인터뷰 통역 및 취재 도움: 김동욱 통역사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다정 기자 (2426w@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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