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 제3구간 인월~금계(하)

knnews 2025. 10. 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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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이 진미가 켜켜이… 사계의 풍광도 층층이

상황마을~등구재~창원마을로 이어지는 계단논
논두렁 구불구불 꾸밈없고 정직한 자연미 선사
거북이 형상 등구재, 전라-경상 잇는 가교 역할
전나무와 천왕봉 조화 만나는 금대암 조망 최고


◇다랑이

언제부터인지 다랑이 하면 많은 사람은 남해의 가천마을을 떠올리게 된다. 경사진 비탈에 켜켜이 쌓인 논배미들이 확 트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가졌다 해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다랑이의 대표적인 명소가 된 것이다.
지리산둘레길 상황마을의 계단식 논 ‘다랑이’. 이곳이야말로 다랑이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휘어진 논두렁의 층층이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지리산둘레길 상황마을의 계단식 논 ‘다랑이’. 이곳이야말로 다랑이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휘어진 논두렁의 층층이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말하자면 보통명사인 다랑이가 그곳에서는 가천마을 대신 다랭이마을이라는 고유명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다랑이의 진미를 보려면 지리산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고, 그중에서도 지리산둘레길 제3구간인 상황마을과 등구재 너머 창원마을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나는 다랑이를 최고로 치고 싶다. 나는 이곳의 다랑이야말로 다랑이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해 본다.
등구재.

등구재.
창원마을 다랑이. 멀리 구름속 천왕봉이 보인다.

창원마을 다랑이. 멀리 구름속 천왕봉이 보인다.

경사진 산비탈을 평탄하게 일구어 적당한 높이로 막돌을 쌓고 논두렁을 만든 후 고랑의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만든 계단식 논들을 다랑이라고 한다. 다랑이는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지어야 하는 특성상 논바닥이 평평해야 하므로 비탈에 따라 논두렁들이 구부렁할 수밖에 없고, 그 휘어진 논두렁의 층층이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랑이의 아름다움은 등고선을 그리듯 구불구불한 논두렁의 연속적 선형인 꾸밈 없는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연에 거역하지 않은 최소한의 인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오랜 세월 자연에 순화되고 인위적 요소가 탈색되어 오히려 천연적인 모습으로 진화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랑이는 계절에 따라 다른 색감으로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데, 여름날의 다랑이는 짙푸른 볏잎의 힘찬 기운을 담고 있어 건강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가을의 다랑이는 황금빛 벼 이삭이 눈부실 정도의 원숙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겨울의 다랑이는 벼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봄의 다랑이는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워내는 몽롱한 아름다움을 지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늦은 봄, 모내기하기 위하여 논배미마다 물을 가득 담았을 때의 모습이 다랑이의 사계 중 가장 아름답다. 논배미에 물이 가득가득한 모습이 층층진 호수들이 온산 가득 널려 있는 듯하고, 반짝이는 물빛이 유순한 곡선의 논두렁과 어울려 마치 별천지 같은 풍광을 자아낼 때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이다.
창원마을 하늘길.

창원마을 하늘길.
지리산 조망.

지리산 조망.

◇등구재

등구재는 제3구간의 상황마을에서 창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삼봉산에서 백운산으로 내려서는 지능의 안부에 위치하는데, 이 지능을 경계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을 가르는 도계(道界)가 된다. 아무튼 이 고개의 이름에 대하여 아홉 굽이를 돌아 오른다는 의미로 등구치(登九峙)라 이름하거나, 오르는 거북의 형상을 가졌다 하여 등구재(登龜岾)로 부른다는 두 가지의 견해가 전한다. 전자의 견해는 현재 고개 아래에 마천 등구(登九)마을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내 개인적으로는 거북 ‘구(龜)’의 등구재에 한 표를 던진다. 김종직의 지리산 유람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도 같은 표기가 보인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기에 엄천, 쑥밭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그리고 영신봉을 거쳐 백무동으로 하산하여 실택리에서 일행과 헤어진다. 유두류록에는 그 직후의 행로를 “나는 등구재(登龜岾)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라고 기록하였다. 등구라는 당시의 지명은 옛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한다. ‘등구 마천 큰 애기는 곶감 깎으러 다 나가고, 지리산에 줄 박달은 처녀 손길에 다 녹는다.’ 또 변강쇠전 사설에 ‘등구 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樵軍)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와서…’라거나,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어떤 장승 하나 서 있거늘…’ 등 많은 곳에서 ‘등구 마천’이 등장한다. 등구 마천이라는 당시의 지명은 현재의 마천면 구양리 등구마을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삼봉산·오도봉·법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의 골 전체를 아우르는 지명이라 추정된다. 그래서 ‘등구’가 아니라 ‘등구 마천’이었다. 골의 형국, 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기어 올라가는 지형이라는 풍수적 설명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아무튼 옛날에는 이 고갯길을 이용하여 함양과 인월·운봉을 왕래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을 터. 그러나 현재 60번 지방도가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등구재는 옛이야기 속에 묵은 지명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지리산둘레길이 개설되면서 다시금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통로로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은 역사 속 기억을 끄집어내어 현재로 연결 짓는 시간적 가교의 역할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금대암 전나무와 천왕봉.

금대암 전나무와 천왕봉.

◇망지리(望智異) 구간

둘레길 제3구간의 중황·상황마을과 창원·금계마을 구간은 지리산을 조망하면서 걷는 길이다. 등구재를 중심으로 남원의 중황·상황마을 구간에서의 지리산 조망은 삼정산 뒤편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있는 지리산 주능선의 자태가 일품이고, 함양의 창원·금계마을 구간에서는 바특이 다가선 천왕봉 조망이 압권이다. 이렇듯 제3구간은 지리산 밖(外智異)에서 내(內)지리를 조망하는 망(望)지리의 구간이다.

그리고 둘레길에서 벗어난 등구재 인근의 도처에는 빼어난 지리산 조망처가 산재한다. 등구재에서 우측(남쪽) 등로로 꺾으면 백운산·금대산으로 이어지고, 좌측(북쪽) 등로로 오르면 삼봉산이다. 삼봉산(1187m) 은 지리산 조망처로 최고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지릉의 끝자락인 금대산과 금대암 역시 대단한 조망처라 할 수 있는데, 나는 그중 금대암을 최고의 조망처로 꼽고 싶다. 금대암 앞마당에 서면 바특이 다가서 있는 창암산 너머로 지리산 능선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중봉·하봉·천왕봉에서부터 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을 거쳐 칠선봉·덕평봉·벽소령까지의 지리산 주능선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손에 잡힐 듯 친숙하게 다가선 천왕봉의 실체를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물론 금대산에서의 조망이 이보다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히려 이곳을 천왕봉 조망처로 최고의 자리라고 꼽은 이유는 이곳의 전나무 때문이다.

이곳에서 천왕봉을 조망하려면 이 나무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이 나무가 금대암 앞마당의 바로 밑에 자리한 이유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등등(騰騰)하면서 장엄한 천왕봉의 풍광 위에 쭉 뻗어 오른 늠름한 이 나무의 힘찬 모습이 겹치는 그림을 만나게 된다. 나의 발걸음에 따라 이 나무는 하봉이나 중봉에 살짝 걸쳐지기도 하고, 제석봉이나 연하봉과 어울리면서 주인공인 천왕봉을 더 돋보이게도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천왕봉 조망은 이 전나무와의 절묘한 구도로 인하여 빼어난 그림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어울림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곳을 최고의 조망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황부호 작가

황부호 작가

글·사진= 황부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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