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 호텔 옆 ‘보이스피싱 지옥’… 정치권 결탁한 범죄조직이 운영
캄보디아 ‘범죄 도시’ 시아누크빌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250㎞를 달리면 최대 항구 도시 시아누크빌이 나온다. 남부 캄포트주 보코산 국립공원, 서부 국경 지대 포이펫 등과 함께 ‘웬치’라고 불리는 대규모 범죄 단지가 밀집한 지역이다. 이곳은 지난 10년간 ‘차이나 머니’(중국 자본) 유입과 캄보디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관광·카지노 도시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글로벌 경기 침체 등을 겪으면서 최근엔 중국 출신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주요 범죄 무대로 전락했다.
시아누크빌 해변에서 북동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16개 호텔과 카지노가 모인 복합 관광 단지가 있다. 단지 한복판에 있는 8층짜리 고급 호텔에는 호화 카지노, 광둥식 고급 레스토랑, 노래방 시설이 들어서 있다. 밤만 되면 황금빛 조명을 뿜어내며 관광객을 부른다.

그런데 이 호텔 바로 옆 건물은 관광객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제한 구역’이다. 현지 당국과 교민들에 따르면 이 건물에선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들이 범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한 현지 교민은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도네시아 청년들이 이곳에 감금돼 ‘일’하고 있다”며 “모진 고문을 당하다 탈출했다는 소문이 며칠에 한 번꼴로 들린다”고 했다.
이 호텔과 보이스피싱 아지트 건물을 소유한 사람은 중국 출신 쉬아이민(徐愛民·63)이다. 2013년 중국에서 불법 온라인 도박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직후 도주해 지명수배가 내려진 범법자다. 그는 캄보디아로 잠입해 신분을 세탁한 뒤 귀화해 ‘호텔 사업가’의 탈을 쓰고 범죄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정체는 지난달 미국 재무부가 개인 제재를 내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사기 범죄 조직이 한국은 물론 미국인들의 호주머니까지 털다가 미국 제재 대상에 올랐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작년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인을 상대로 벌인 사기 범행 피해 금액은 약 100억달러(약 14조원)였다. 미 재무부는 “쉬아이민이 소유한 호텔 옆 건물에서 감금된 노예 노동자들이 사기 행위를 강요당하고 있다”며 “(범죄 수익금은) 프놈펜에 세운 부동산 개발 회사를 통해 세탁하고 있다”고 했다.
쉬아이민과 함께 미 정부 제재를 받은 둥러청(董樂成·57)도 시아누크빌에 주식회사를 설립해놓고 사업가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텔 내부에 범죄 조직 아지트를 꾸리고 보이스피싱 등 사이버 범행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텔에 있는 카지노에선 보이스피싱 범죄 수익금을 세탁하고 있다고 미 정부는 밝혔다. 미 국무부는 “둥러청의 호텔에서는 인신매매도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감금 피해자들이 다른 범죄 조직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2014년 중국에서 불법 도박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도주해 2015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사기단을 운영하기 시작한 셔즈장(佘智江·43)은 최근 사업을 미얀마·태국까지 확장했다. 최근 중국 정부의 해외 도박 단속이 강화되면서 중국인들이 캄보디아로 도박 자금을 들여올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중개인이 중국 내에서 도박 참가자 돈을 받아둔 뒤, 캄보디아 중개인이 현지 카지노에서 캄보디아 화폐로 환전·지급해 주는 ‘3자 지불’ 방식을 고안했다고 한다.
국제사회는 이들처럼 중국에서 각종 사기 범행을 벌이던 중국인 범죄자들이 캄보디아로 도피해 거대한 사기 범죄 산업을 키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 5월 인권·정책 연구기관 휴머니티리서치컨설턴시(HRC)가 발간한 보고서는 “지난 10년간 캄보디아 정부가 자금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중국인 범죄자들에게 수십만 달러를 받고 시민권을 부여했다”며 “중국에서 작은 규모의 사기를 벌이던 범법자들이 캄보디아를 주름잡는 ‘큰손’이 됐다”고 했다.
훈 센 전 캄보디아 총리는 1997년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한 뒤 ‘절대 권력’을 누려왔다. 2023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아들인 훈 마넷 현 총리가 뒤를 이었다. 현지 교민들 사이에선 범죄 조직들이 캄보디아 독재 정권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도피 범죄자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랜 기간 지속된 독재 체제, 부족한 경찰 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캄보디아는 범죄에 관대한 나라”라는 인식이 세계로 퍼지고 있다. 캄보디아 당국은 2020년 초부터 매년 보이스피싱 조직을 단속하고 ‘범죄를 소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선 “봐주기 단속”이란 의구심을 나타낸다.
미국평화연구소(USIP)에 따르면 작년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온라인 범죄를 통해 범죄 조직들이 거둔 이익은 125억달러(약 17조2500억원). 캄보디아 국내총생산(GDP)의 27%였다. 이 범죄 수익의 상당 부분이 세탁돼 캄보디아 지배층에 흘러들어 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의 작년 5월 보고서에 따르면 캄보디아 정부는 탈출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붙잡아 범죄 조직으로 돌려보내는 등 범죄 조직에 적극 협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주요 기관들도 “동남아 사기 산업은 미국에 대한 중국 범죄 조직의 최대 위협 중 하나” “(중국으로부터 미국에 유통되는) 마약 펜타닐의 위협에 맞먹을 정도”라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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