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이 정한 ‘생명의 순리’를 깼다, ‘복제의 아버지’ 존 거든


존 거든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복제 연구 기틀 닦은 존 거든 별세
줄기세포도 연구...노벨상 수상
이튼 칼리지 시절 전교 최하위
“학업 성취도는 참담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과제 중 하나는 50점 만점에 2점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습을 보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조차 배우지 못한다면, 전문 과학자의 일을 해낼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도전은) 그의 시간 낭비이자, 그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시간 낭비가 될 겁니다.”
1949년 여름 학기, 영국 이튼 칼리지 교사가 적은 한 학생의 생물 성적표 내용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랄한 혹평을 합니다. 이 학생의 생물학 성적은 학년 250명 가운데 250등이었습니다. 이런 학생이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니 어이가 없긴 했을 겁니다. 학교는 과학 수업을 못듣게 하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수업반으로 학생을 옮깁니다. ‘학문에 몸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은 학생을 특별 관리하는 학급이었습니다.
훗날 이 교사가 학생의 업적을 확인했다면, 교사는 자신의 안목에 절망했을 겁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학생의 이름은 존 거든(Sir John Bertrand Gurdon). 생명의 탄생과 세포의 운명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입니다. 지난 10월 7일(현지 시각)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거든에 대해 과학계는 “세포에 대한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복제(複製)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합니다.
어린 시절 내내 따라다닌 ‘모자라다’는 평가
거든은 1933년 10월 2일 영국 햄프셔의 시골 마을 디펜홀에서 태어났습니다. 은행원 아버지는 40대에 조기 은퇴한 뒤 시각장애인을 위해 교과서를 점자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거든의 가문은 11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가훈은 ‘역경 속에서 덕은 더욱 빛난다(Virtus viget in arduis)’였다고 합니다.
거든은 특이했습니다. 여덟 살 때 프렌셤 하이츠라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는데, 지능 검사에서 교사가 “오렌지를 그려보라”고 하자 오렌지가 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상상하며 꼭지를 먼저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켜보던 교사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정신적으로 모자라며 특별 교육이 필요하다.” 이 시기 아이들은 오렌지를 그리라고 하면 당연하게 원 형태부터 그리는 게 정상이라고 본 겁니다. 거든은 학교를 옮겨야 했습니다.
거든은 곤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집에서 나방과 나비를 키웠고, 이튼 칼리지에 입학할 때는 병에 애벌레를 담아 갔습니다. 충격적인 생물 성적표 사건을 겪고 이튼 칼리지를 졸업한 뒤 거든은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첫 전공은 고전문학이었습니다. 동물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때 과학 과목을 제대로 수강하지 않아 수강신청을 거부당한 겁니다. 1년간 개인 교사에게 기초 생물학·물리·화학 수업을 들은 후에야 동물학 전공이 허락됐습니다.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거든은 숲속을 걷던 중 특이한 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고, 대학 곤충학자 누구도 그 정체를 몰랐습니다. 거든은 이 표본을 런던 자연사박물관으로 가져갔고, 학예사는 영국에서 처음 발견된 ‘톱벌레(sawfly)’라고 알려줬습니다. 이듬해 거든의 발견은 곤충학 학술지에 실렸습니다.
이 영광스런 사건은 곤충학 박사 과정에 입학하려던 거든에겐 오히려 악재가 됩니다(이때는 몰랐지만 거든과 인류에겐 엄청난 호재였습니다). 자신조차 몰랐던 곤충을 발견한 학생이 달갑지 않은 교수는 거든을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발생생물학을 가르치던 미하엘 피슈베르크 교수가 거든을 눈여겨봅니다.
세포와 생명의 방향성을 뒤집다
피슈베르크 밑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한 거든의 실험 대상은 당시 생물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동물 개구리였습니다. 정확히는 아프리카 발톱개구리(Xenopus Laevis)였는데, 수년 전인 195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토머스 브릭스 교수와 대학원생 로버트 킹이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역사적 논문에서 이어진 실험입니다.
브릭스와 킹은 개구리의 수정란에서 핵을 제거한 뒤 올챙이 체세포에서 추출한 핵을 주입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조작한 수정란 일부가 올챙이로 자란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핵 이식 실험으로 불리는 이 케이스는 ‘세포는 한 번 분화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생물학의 교리(敎理)와 같은 상식에 대해 의심을 싹트게 했습니다. 당시 상식으로는 체세포 핵이 수정란의 핵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브릭스와 킹의 실험은 상식을 깨기에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분화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은 체세포의 핵을 수정란에 넣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포로 자랄 수 있는 배아세포의 만능성이 남아 있는 세포를 넣었기 때문에 우연히 일부가 올챙이로 자랐다는 과학계의 반박이 잇따랐습니다.

거든은 이런 논란이 없는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그것이 성공하면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개구리 수정란에 완전히 분화가 끝난 장(腸) 상피세포의 핵을 이식해 올챙이로 성장시킨 겁니다. 완벽한 복제 개구리를 탄생시킨 겁니다. 6년에 걸쳐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얻어낸 성과였습니다. 생명과학에서 ‘고전(Classic)’으로 불리는 이 실험은 세포와 생명을 바라보는 과학계의 이전 시각이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수정란에 이식된 장세포가 다시 프로그래밍돼 장세포의 역할을 버리고 올챙이로 자랄 수 있는 기능이 되살아난 겁니다. 장세포가 원시세포(줄기세포)로 바뀐 거죠. 겉으로는 역할이 정해진 것 같은 모든 세포가 여전히 완전한 유전 정보를 보존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이 과정을 핵 재프로그래밍(nuclear reprogramming)이라고 합니다.
줄기세포와 복제의 탄생
세포의 시간과 역할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낸 거든의 나이는 고작 28살이었습니다. 거든의 실험에서 비롯된 수많은 과학자의 노력은 거든조차 상상하지 못한 성과를 낳고 있습니다. 1980년 핵 재프로그래밍이 양서류뿐 아니라 포유류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이 밝혀졌고, 1996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이언 윌멋이 최초의 복제 포유동물 복제양 ‘돌리’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복제한 소·말·돼지·고양이·개도 탄생했습니다. 한때 한국 사회의 영웅이었다 추락했던 황우석 박사의 현재 주력 사업이 이 복제 동물입니다.
세포를 다시 프로그래밍해 만능 세포로 시간을 되돌리는 원리는 줄기세포 연구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세계 과학계와 글로벌 제약사들은 손상된 장기를 복구하거나 신경·퇴행성 질환 치료, 맞춤형 세포 치료 등 수많은 분야에 줄기세포를 활용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를 ‘21세기의 불로초’라 부르기도 합니다. 망막이나 신경 관련 일부 질환에서는 기적같은 성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핵 재프로그래밍의 원리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거든의 실험 이후 40년 이상이 지난 뒤였습니다. 주인공은 외과 의사지만, 임상의의 재능은 없다고 생각하고 줄기세포 연구에 매진한 아웃사이더. 일본 교토대의 의사과학자 야마나카 신야 교수였습니다.
그는 ‘전사인자’라 불리는 유전자(DNA) 조절 단백질이 세포의 재프로그래밍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2012년 노벨위원회는 거든과 야마나카 두 사람을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두 사람은 성숙한 세포가 영원히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면서 “교과서를 다시 쓰고,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고 했습니다. 거든 입장에서는 50년 만에 노벨상을 받은 셈이죠. 그의 뒤를 이어 실제 성과를 만들어낸 제자와 후배 과학자들이 없었다면 그 영광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와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을 거친 거든에 대해 제자들은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삶 자체가 과학이었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의 처음에 등장했던 이튼 칼리지의 잔인한 성적표, 거든은 이 성적표를 액자에 넣어 평생 보관했습니다. 노벨위원회 홈페이지의 수상 업적 소개에도 이 액자 사진이 올려져 있습니다.
거든은 일이 안 풀릴 때면 이 액자를 쳐다봤다고 합니다. “내가 진짜 이 일에 소질이 없는 것일까”라고 물었답니다. 오늘날의 생명공학 발전에 이름 모르는 이튼 칼리지 생물학 담당 교사의 기여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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