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종이에서 솜으로…파리에서 피어난 한국 추상

이성현 기자 2025. 10. 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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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미술관, 24년 만의 단독 회고전 '꼴라주-이응노의 파리 실험실' 호응
1960년대 파리 정착기 '종이 꼴라주'부터 70년대 재료 실험까지 '한눈에'
한국적 감성으로 구축한 실험적 추상의 모태…직물·신문 등으로 재해석
이응노미술관이 내달 23일까지 2-4전시장에서 '꼴라주-이응노의 파리 실험실'을 선보인다. 사진은 전시 포스터. 이응노미술관 제공

이응노미술관이 가을 기획전으로 선보인 '꼴라주-이응노의 파리 실험실'이 개막 한 달여 만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작가가 파리 정착 초기에 몰두했던 '종이 꼴라주'만을 집중 조명한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이응노 추상의 출발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전시'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실험적 작업을 통해 작가의 창조적 전환을 따라가며, 동시대 프랑스 미술과의 대화를 함께 보여준다. 한국적 재료로 서구 추상의 언어를 재구성한 이응노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자리다.

이응노 '구성', 1960, 캔버스에 종이 꼴라주, 채색, 131×82cm. 이응노미술관 제공

◇질감의 탐색, 1960년대 파리의 실험

이번 전시는 작가의 1960-70년대 꼴라주 작업을 시대별로 구성했다. 2-3전시장은 '질감의 탐색'을 주제로, 파리 정착 초기에 제작된 종이 꼴라주를 집중 조명한다.

1960년 파리에 도착한 이응노는 당시 경제적 여건상 물감조차 마음껏 쓸 수 없었다.

김상호 이응노미술관 학예팀장은 간담회에서 "당시 이응노는 파리의 길거리를 돌며 버려진 신문과 잡지를 주워 색면을 오려 붙였다"며 "빨강·노랑·검정 등 인쇄 색상을 물감 대용으로 사용해 화면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종이 꼴라주는 단순한 재료 절약의 산물이 아니었다. 잡지의 활자와 인쇄면을 시각적 요소로 삼고, 한지 위에 먹을 입혀 동양화적 질감을 더했다. 1962년 파리 폴 파케티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의 제목이 'Ung-No Lee, Collages'였던 것도, 꼴라주가 작가의 현대성과 실험정신을 상징하는 이유다

이응노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꼴라주를 계승하면서도, 단순한 서구적 모방을 참고하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의 조각들을 촘촘히 붙여 화면의 두께를 만들고, 한지를 구기거나 찢어 질감을 더해 '거칠고 힘 있는' 화면을 완성했다. 이러한 실험은 전후 프랑스 화단의 앵포르멜(Informel) 경향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 프랑스 화가들이 시멘트·진흙·모래를 올려 회화적 질감을 추구했다면, 이응노는 종이라는 동양적 재료로 그 실험을 변주했다.

특히 이 시대 작품들은 종이를 밀집시켜 붙이고 먹과 색채를 덧입혀 나무껍질처럼 거친 표면을 만들었다. 마치 부조처럼 솟아오른 종이의 층위는 빛에 따라 반짝이며,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효과를 낸다.

김 팀장은 "멀리서 보면 자개장의 빛이 반사되는 듯한 시각적 깊이가 느껴진다"며 "신문의 활자와 색면이 추상적 리듬을 만드는 대표작"이라고 소개했다

이응노 '구성', 1971, 솜과 종이 꼴라주에 채색 194x125cm. 이응노미술관 제공

◇재료의 확장, 1970년대의 새로운 회화

4전시장은 '재료의 확장'을 주제로, 1970년대 이후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시기 이응노는 종이뿐 아니라 솜, 직물, 천 등을 활용해 평면 회화의 경계를 넓혔다.

김 팀장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응노는 단순히 그리는 화가에서 '붙이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인다. 그는 회화의 표면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솜을 뭉치거나 천을 꿰매 붙인 작품들은 부드러운 질감 속에 부조적 입체감을 드러낸다.

1971년작 '구성'은 솜과 종이를 결합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문 대표작이다. 이듬해 작품인 또 다른 '구성(1972)'은 종이와 천을 중첩시켜 화면 전체를 밀도 있게 채웠다. 이응노가 시도한 이러한 재료 실험은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등장한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urface)' 운동과도 공명했다.

이 운동은 캔버스라는 고정된 틀을 해체하고, 천과 섬유를 실험적 재료로 사용해 회화를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프랑스 작가 장-피에르 팡스망과 끌로드 비알라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 함께 소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 피에르 팡스망 '무제', 1969, 천에 염색, 180×196cm, 이응노미술관 제공

팡스망의 작품은 청바지 천을 오려 붙여 실밥이 드러난 표면을 만들고, 염색과 바느질로 변색과 질감을 병치시킨다. 비알라의 회화는 천 위에 구름 같아 보이는 동일한 모양의 염색을 반복하며 회화의 물질성과 오브제(Object)를 이용한 기법을 선보인다. 비알라 특유의 반복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바탕 위에 칠해진 마티에르(Matiere)' 혹은 '색면이 곧 회화'라는 '쉬포르/쉬르파스'의 특성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김상호 팀장은 "이응노의 솜·직물 꼴라주 역시 당시 파리 화단의 이런 움직임과 나란히 있었다"며 "회화의 물성을 확장하고 재료 그 자체를 조형의 주제로 삼은 실험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이응노의 추상 창작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추적한다.

당시 전시를 다룬 프랑스 언론의 반응도 흥미롭다. 미술관은 당시 신문 자료를 복원해 함께 전시했다.

'한국의 젊은 예술가가 놀라운 실험을 선보였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꼴라주가 파리 화단에서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김 팀장은 "이응노의 꼴라주는 훗날 문자추상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었다"며 "신문의 글자와 종이 조각이 화면 속에서 점차 문자 형상으로 변주되며 새로운 추상 세계로 확장됐다"고 덧붙였다

김상호 이응노미술관 학예팀장이 '꼴라주-이응노의 파리 실험실' 전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성현 기자

◇한국적 추상을 제시한 이응노

이번 전시는 2001년 서울 이응노미술관의 '60년대 이응노 꼴라주전' 이후 24년 만의 단독 꼴라주 회고전이다. 전시에는 이응노의 주요 꼴라주 32점을 비롯해 프랑스 작가들의 회화들도 함께 걸렸다.

이갑재 이응노미술관장은 "이응노의 엄선된 종이 꼴라주 작품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로 작가의 추상 창작의 모태가 되었던 1960년대 꼴라주 작품을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자리"라면서 "이응노가 보여준 현대적·실험적 추상을 통해 작가의 예술은 물론, 한국 근현대회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상호 학예팀장 역시 "이응노의 꼴라주는 단순한 재료 실험이 아니라, 서구미술 속에서 자신만의 추상 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며 "그 속에는 한국적 정서와 동양적 감각이 녹아 있다"고 밝혔다.

'꼴라주-이응노의 파리 실험실'은 내달 23일까지 이응노미술관 2-4전시실에서 열린다. 관람객들은 SNS 해설 영상, 관람 연계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작가의 실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응노미술관 홈페이지와 공식 SNS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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