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미술관에서 만나는 여섯 개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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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찬바람이 매서워지는 11월, 서울 곳곳의 미술관에는 열기로 가득하다. 500년 전 조선 왕손의 피 묻은 붓질부터 8년 만에 1조 4000억을 만든 천재의 낙서, 가위로 잘라 완성하는 일본 텍스타일부터 VR 고글을 쓰고 걷는 4500년 전 이집트, 400년 된 셰익스피어의 책과 빨간색을 밝게 본 화가의 캔버스까지. 대구에서 부산, 서울 용산·한남·동대문을 잇는 전시들은 각기 다른 온도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나선 11월의 미술관 투어. 바깥 공기는 차갑지만, 전시장 안은 뜨거울 것이다.
서울 동대문 DDP - 바스키아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27세, 장 미셸 바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딱 8년, 그 짧은 시간에 3700여 점을 쏟아냈다. 지금 그의 작품 보험가액은 1조 4000억 원에 달한다.
2026년 1월 31일까지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이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열린다. 9개국에서 모은 회화·드로잉 70여 점, 아시아 최초 공개되는 작가 노트 155장까지 총 230여 점이 11개 섹션을 채운다.
전시 개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여동생 제닌 바스키아는 "회사 노트에 캐릭터를 그려 넣으면 넘기는 것만으로 애니메이션이 됐다. 길에서 만난 노숙자에게 100달러를 쥐여주던 사람이었다"고 증언한다. 스물두 살 바스키아는 영상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영화감독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1986년 작 <무제>는 여동생 제닌이 "놓치지 말라"고 강조한 작품. 삼각형 꼭대기에 학이 서 있고 화면은 단어로 빼곡하다. "HEY HEY HEY" 반복. 별, 십자가, 눈, 말풍선. 재즈와 힙합의 리듬이 시각화됐다. 낙서처럼 보이지만 바스키아의 세계관이 압축된 시각적 사전이다. 대중문화 아이콘과 종교 기호, 해부학 드로잉, 원시적 이미지가 한 화면에 격렬하게 충돌한다.
1983년 작 <육체와 영혼>은 4개의 큰 화면과 12개 패널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바스키아는 7살 때 교통사고로 큰 수술을 받았는데, 이 트라우마가 그의 작품에 반복적인 해부학 모티프로 나타난다.
1988년 작 <엑수>(EXU)는 그의 마지막 영적 자화상이다. 요루바 신화의 경계의 신을 통해 자신을 투영했으며, 죽음에 대한 직감과 정체성의 문제를 동시에 드러낸 일종의 '영적 자화상'으로 알려졌다.
거리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SAMO©'로 시작해 자작 엽서와 티셔츠를 팔아 생계를 이었던 그. 1980년대 뉴욕은 빈곤과 인종차별, 폭력의 어둠 속에서도 자유와 창조성, 에너지가 폭발하던 시대였다. 그가 체감한 정체성과 투쟁이 화면을 채운다.
기간 ~2026년 1월 31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전시 1관
관람시간 10:00~19:00(입장마감 18:00)
관람료 성인 2만 4000원
대구 간송미술관 - 왕손의 칼 맞은 오른팔이 그린 500년 전 저항의 기록

1592년 임진왜란. 왕실 출신 문인화가 이정의 오른팔에 왜군의 칼이 꽂혔다. 회복 후 그는 최고급 비단에 금으로 매화, 대나무, 난초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있고, 민족의 정신도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로부터 433년 뒤인 2025년 가을,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이정의 <삼청첩> 56면 전체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린 기획전 <삼청도도-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에는 조선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굴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작품 100여 점이 모였다. 붓으로 저항했던 선조들의 흔적이다.
전시실을 돌다 보면 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이정의 '풍죽(風竹)'. 화폭 속 대나무가 강풍에 휘청이지만 꺾이지 않는다. 간결한 구성, 극명한 먹의 농담, 강경한 붓질. 금방이라도 폭풍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500년을 건너 관람객을 압도한다.
'월매(月梅)' 앞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보름달 아래 피어난 매화. 이정은 미세한 점들을 무수히 찍어 달빛의 은은함을 구현했다. 독립운동가 김진우의 '묵죽'은 또 다른 충격이다. 51세에 그린 이 대나무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억센 마디, 질긴 껍질, 날카로운 잎. 죽창이 연상된다.
기간 ~12월 21일
관람시간 10:00~19:00 (입장 마감 18:00, 월요일 휴관)
관람료 성인 1만 1000원 / 청소년·학생 5500원
그라운드시소 한남 - 가위로 자르면 파도가 일렁인다

10월 3일 문을 연 그라운드시소 한남의 첫 전시는 히무로 유리의 <오늘의 기쁨>이다. 초록 천을 자르자 풀숲 속 동물이 나타나고, 파란 실을 끊으니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위로 겉면을 자르면 숨어있던 안쪽 색이 드러나며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는 이것이 '스닙 스냅(Snip Snap)' 기법이다. 어디를 얼마나 자르느냐에 따라 파도의 높이, 구름의 모양, 동물의 표정이 모두 달라진다.
로에베와 협업한 일본 텍스타일 디자이너 히무로 유리. 서울 전시를 위해 한국 관람객만을 위한 신작을 특별 제작했다. 전시는 '기쁨이 피어나는 정원', '하늘 극장', '바다의 노래' 등 8개 챕터로 구성됐다.
기간 ~2026년 3월 29일
관람시간 10:00~19:00(입장 마감 18:00)
관람료 정가 2만원
부산박물관 - 전 세계 230권뿐, 셰익스피어가 부산에 왔다

1623년 런던.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7년 뒤, 동료 배우들이 그의 희곡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퍼스트 폴리오. 전 세계에 230여 권만 남은 이 책이 부산박물관에 도착했다. 국내 최초다.
내년 1월 18일까지 부산박물관에서 열리는 '거장의 비밀: 셰익스피어부터 500년의 문학과 예술',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아시아 최초 순회전이다. 셰익스피어부터 J.K. 롤링까지, 영문학 거장 78인의 초상화와 친필 원고, 희귀 초판본 137점이 400평을 가득 채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초판본. 1813년 처음 출간할 때 작가는 익명이었다. 브론테 자매가 남자 이름으로 출판했던 시집도 나란히 놓였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친필 원고도 있다. 펜으로 긋고 고친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코난 도일의 '베일 쓴 하숙인', J.K. 롤링의 해리포터 초판본. 1997년 첫 출간 당시 5000부만 찍었던 그 책이다.
전시는 5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에필로그 '문학으로 물드는 시간'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초상과 친필 원고도 공개된다.
기간 ~2026년 1월 18일
관람시간 09:00~18:00(월요일 휴관)
관람료 성인 1만 5000원 (부산시민 현장 구매 시 2000원 할인)
서울 모다 갤러리 - 빨간색이 밝게 보인다면?

미셸 앙리의 눈은 특별했다. 보통 사람들이 어둡다고 느끼는 빨간색을 그는 밝게 봤다. 전 세계 30개국에서 온 빨간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캔버스 위 빨간색은 실제로 빛을 냈다.
8월 12일부터 12월 14일까지 용산 모다 갤러리 '미셸 앙리: VIVID'. 프랑스 색채주의 화가 미셸 앙리(1928-2016)의 회고전이다. 80여 점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가 색을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미셸 앙리의 그림에는 제작 연도가 없다. 그의 그림 속 파리, 베니스, 망통은 실제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상상의 풍경이다.
'투명성'이라는 작품에는 그의 모든 특징이 담겨 있다. 반투명한 커튼, 투명한 유리병, 작고 붉은 과일. 꽃잎은 유화 물감을 두껍게 발라 입체감을 냈다.
전시장 벽이 붉다. 4층은 빨강, 3층은 보라와 분홍. 플라워 브랜드 청록화가 협업해 전시장 곳곳에 생화를 설치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는 오감 전시다.
3층은 어둡다. 조명이 작품만 비춘다. 그림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양귀비꽃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금방 시드는 양귀비. 미셸 앙리는 그 덧없는 순간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봤다.
기간 ~ 12월 14일
관람시간 10:30-19:00 (월요일 휴관, 입장 마감 18:30)
관람료 성인 1만 5000원 / 청소년·어린이 1만 1000원
특별 오디오 도슨트 god 손호영
용산 전쟁기념관 - VR 고글을 쓰자 눈앞에 피라미드가 솟았다

300평 빈 공간. 그 안에 30명이 VR 고글을 쓰고 서 있다. 순간, 바닥이 사라지고 기원전 2565년 이집트 사막이 펼쳐진다. 몸이 하늘로 떠오른다. 146미터 높이 쿠푸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날아간다.
3월 27일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시작되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2022년 파리 첫 공개 이후 전 세계 20개 도시, 150만 명이 체험한 몰입형 VR 탐험이다.
피라미드 외벽을 타고 내려간다. 입구 안으로 보이는 좁은 복도, 천장이 낮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면 벽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횃불에 비친다. 여왕의 방, 왕의 방, 일반인에게 공개된 적 없는 비밀의 공간들을 발견한다. 하버드 대학 이집트학 교수 피터 데 마뉴엘리안의 수년간 연구 데이터가 기반이다. 모든 디테일이 고증됐다.
나일 강변에서는 쿠푸 파라오의 장례식 행렬이 다가온다. 황금빛 관을 실은 배가 천천히 물 위를 미끄러진다. 관 앞에 무릎 꿇고 왕의 마지막 여행에 동행한다.
기존 VR과 다른 점은 고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옆을 보면 다른 참가자들이 보인다. 가족,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은 서로를 확인하며 걷는다. 프랑스 Excurio가 개발한 기술로 서울 전시는 300평 전체를 쓴다. 벽에 부딪힐 걱정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기간 ~11월 30일
관람시간 09:30~18:00(입장마감 17:00, 체험시간 45분)
관람료 성인 3만원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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