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69 삼국통일 이후
동궁과 월지 건축하고 문화외교와 군사적 시설로 활용

신라 30대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하고도 안정적인 나라를 경영하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문무왕은 화랑이 돼 전쟁터를 누비면서 백성들이 전쟁으로 논과 밭두렁에 죽은 시신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던 현장을 보며 전쟁 종식으로 기어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왕이다.

◆신화전설 1: 남산신성 보강하고 장창을 세우다
경주 남산은 왕릉과 산성, 무기와 곡식의 창고 등의 시설을 비롯해 불교적인 흔적이 가득한 신라의 성산이다.
남산 그 서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는 '해목령(蟹目嶺)'이라는 특별한 이름의 고개가 있다. 넓은 바다에서 강하지 않은 몸으로 단단하게 살아가는 대게의 눈처럼, 남산에서 툭 불거져 신라의 왕도 서라벌을 내려다보는 이 고개는 신라 국방의 눈이었다.
서라벌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서라벌 어디에서든 한 눈에 바라다보이는 해목령에 문무왕은 나라의 안녕과 통일 이후의 내외 위협에 대비해 거대한 창고와 남산신성의 핵심 방어거점을 구축했다.

문무왕은 이러한 지형을 군사 전략의 중심으로 삼았다.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나라와의 갈등, 왜의 침입 위협은 여전했다.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문무왕은 철저하게 군사를 가다듬었다.
해목령에는 무기와 곡식을 저장할 세 개의 거대한 창고가 건립됐다. 좌창, 우창, 중창이라 불린 이 창고들은 각각 길이가 50m, 50m, 100m에 달하는 대형 규모였다. 이러한 규모는 단순한 방어를 넘어서 장기전에 대비한 국가적 규모의 비축 시스템이자 백성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다.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불에 탄 쌀이 발견되고 있어 실제 창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창고는 혜공왕 2년(767년)에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남산신성비에 기록된 축성 방식은 해목령을 포함한 남산신성의 방어망이 단지 지역적 방어가 아니라 신라 전역의 참여와 책임 아래 조직된 국가적 방어체계였음을 보여준다. 일정한 구간을 각 부락이나 집단이 맡아 축조하며 3년 내에 무너지면 천벌을 받는다는 엄숙한 서약까지 남긴 것은 이 성이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심의 결집체였다.

◆흔적: 동궁과 월지, 장창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중심지 왕궁 월성을 확장하는 의미에서 동궁과 월지를 건설하고, 도성을 사수할 최후의 보루로 남산에 창고를 짓고, 더불어 남산신성으로 튼튼하게 개보수했다. 왕성을 수호하기 위한 남산신성, 통일신라의 격조 높은 문화와 국정 운영을 위한 동궁과 월지는 단지 물리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문무왕 이후 통일신라가 품은 평화와 군사, 예술과 정치의 이상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남산신성은 신라 진평왕 13년(591년)에 처음 쌓았고, 문무왕 19년(679년)에 크게 보수, 재축성됐다. 이는 단순한 산성이 아닌, 신라 국방 체계의 심장부였다. 북쪽으로 경주 시내와 월성, 동쪽으로 명활산과 낭산, 서쪽으로는 서악과 단석산이 조망되는 위치에 자리잡은 남산신성은 서라벌을 지키는 '성곽의 눈'이자 왕경의 마지막 방패였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의 평화시대가 낳은 찬란한 문화의 결정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월성 동쪽에 정치와 외교, 문화의 중심이 될 별궁을 세웠다. 그 중심에 인공 연못인 '월지'를 조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든다 하여 '안압지'라 불렸으나, 발굴 결과 '동궁과 월지'라는 본래의 명칭으로 회복됐다.
월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산을 만들고 진귀한 동물과 식물을 기르며 정원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나아가 동궁의 임해전은 외국 사신 접대와 연회, 군사 훈련장소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며 신라 왕권의 대내외적 위상을 과시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3만3천여 점의 유물은 이 공간이 단순한 정원을 넘어서 왕실의 생활문화와 국제교류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신화전설 2: 동궁과 월지를 짓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는 한층 더 넓어진 국토와 다민족이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 광대한 영토, 당과의 외교전, 그리고 내부의 안정을 동시에 꾀해야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러한 때 문무왕은 단순한 궁궐 이상의 공간, 동궁과 월지를 건설했다.
동궁은 본래 태자의 거처이자 정치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문무왕은 이 동궁을 신라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동궁 옆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월지'는 단지 아름다운 연못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꽃을 심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동궁과 월지가 통일신라 왕권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월지에는 임해전을 포함한 26개소의 건물지가 존재했으며 사신 접대와 외교, 군사회의, 연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발굴된 유물 3만3천여 점은 목선, 주령구, 금속공예품, 기와, 목간 등 당시 왕실 문화의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특히 목선은 실제 수상 연회를 위한 것으로, 선착장과 함께 바다처럼 설계된 월지에서 뱃놀이를 즐기던 장면이 상상된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 뒤에는 문무왕의 철저한 전략이 숨어 있었다. 동궁과 월지는 단지 정원과 연회장소가 아닌, 군사적 기능까지 수행한 이중 구조의 공간이었다. 실제로 월지는 비밀결사대의 훈련장소이기도 했다. 문무왕은 전쟁을 대비해 실력 있는 화랑들을 포섭해 결사대를 조직했고, 이들은 월지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실전감각을 익혔다.
나아가 동궁과 월지는 외국 사신에게 신라의 위용을 각인시키는 외교적 쇼윈도였다. 고구려의 성벽 기술, 백제의 정원 미학을 집대성한 이 공간은 통일신라라는 국가 브랜드의 상징이었다. 낮에는 문화와 정치의 중심으로, 밤에는 빛나는 조명 아래 왕권의 위엄을 드러냈던 이곳은 신라의 격조 높은 예술성과 안정적인 국력의 위상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 동궁과 월지는 역사와 조명이 어우러지는 경주의 대표 명소로서 1천400백년 전 문무왕의 국가경영 철학과 군사전략, 그리고 문화예술에 대한 집념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전쟁을 준비하되, 평화를 노래하고자 했던 문무왕. 왕의 이상은 동궁과 월지에 그대로 새겨져 오늘도 물결 위를 흐르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