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지를 찾아서] 경북 영천 포도…‘샤인머스캣’ 대세 속 품종 다변화로 새 길 모색 | 디지털농업
이 기사는 성공 농업을 일구는 농업경영 전문지 월간 ‘디지털농업’10월호 기사입니다.

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 따르면 영천에서 오늘날과 같은 포도 재배의 기반이 갖춰지기 시작한 시기는 1977년 두산그룹이 인접한 경북 경산에 ‘마주앙’ 공장을 세운 때부터다. 당시 일부 농가가 양조용 포도를 계약재배했다. 이 때문에 재배 초기에는 <다노레드> 같은 수확량 위주의 양조용 품종이 확산해 품질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천 포도가 지금과 같이 전국적인 명성을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2003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는 영천을 비롯한 국내 포도 산업에 큰 충격을 안겼다. 전성호 영천시농업기술센터 기술지원과 과수연구팀장은 “껍질째 먹을 수 있으면서 씨가 없는 칠레산 포도가 대거 수입되면서 국내산이 편의성과 맛·가격 등 경쟁에서 밀리게 됐다”며 “수입 포도가 가진 장점 때문에 해마다 급격하게 수입량이 증가하면서 국내 포도 시장을 잠식하다가 결국 2013~2014년 국내 포도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했고, 이에 대한 보완 대책으로 정부가 폐원 사업과 품종 전환을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FTA로 피해를 봤지만, 당시 마련된 FTA 지원 자금은 지금까지도 영천 포도 재배 기반을 떠받치는 주요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농가들의 끊임없는 품질 개선 노력이 더해졌다. 2021년 영천시가 포도 분야 제1호 농업 명장으로 선정한 신길호 ‘탐스러운 포도원’ 대표(57)도 한·칠레 FTA를 영천 포도 산업의 전환점으로 회고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전체적으로 재배시설이 열악했어요. 영천은 기후 조건이 좋아 시설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포도가 잘 열렸거든요. FTA 이후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신 대표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경북도농업기술원과 영천시농업기술센터 등 농업기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영농 교육을 통해 체계적인 농업 지식을 쌓았고, 지역 농가들과 연구회를 조직해 선진 기술과 정보를 교환하며 영천 포도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왔다.
2020년 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프리미엄 샤인머스캣 생산과 해외 수출을 목표로 ‘뉴스타수출포도작목반’을 조직한 신 대표는 “상품을 규격화할 수 있는 재배 기술을 기반으로 고품질 포도를 생산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장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규격화는 단순히 포도송이의 크기를 일정하게 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세를 균일하게 관리해 개화·착과 시기를 맞추고,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련의 기술 체계를 의미한다.

현재 샤인머스캣은 크고 탐스러운 송이가 고급 포도로 인식되며, 시장에서는 한 송이 무게가 800g 안팎일 때 가장 좋은 값을 받는다. 하지만 송이가 커질수록 알맹이 간 당도 편차와 저장성 저하 문제가 따른다. 뉴스타수출포도작목반은 맛과 균일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 한 송이 무게 500~700g, 당도 18브릭스 이상으로 규격화하는 기준을 고수한다. 고품질 포도 생산에는 시설 개선도 뒤따라야 한다. 신 대표는 일찍이 엇지붕 비가림 시설과 공기 순환팬 등을 도입했다.
“기온이 30℃를 넘으면 포도잎의 광합성 효율이 떨어지고, 오히려 저장된 영양분을 소모하게 되죠. 이는 맛의 균일성과 저장성 약화로 이어집니다. 기후변화가 심화하는 만큼 그에 맞는 시설 개선이 이뤄져야 전체적으로 영천 포도의 품질이 향상될 것으로 봅니다. 경영비 부담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한 농가들이 결국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편, 샤인머스캣이 고소득작물로 인식되며 청년 농업인과 귀농인의 재배도 이어지고 있다. 신 대표는 교육 과정에서 후배 농업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밭 조성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포도는 뿌리가 깊게 내려가기보다는 지표 가까이에서 넓게 뻗는 천근성 작물이다. 결국 뿌리 주변, 즉 근권 환경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열매 품질을 좌우한다. 배수와 통기, 수분과 온도를 세심히 조절해야 수세와 과일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결국 밭을 잘 만들어야 나무가 오래가고, 나무가 오래갈수록 경제성이 좋아집니다.”
“당도는 비교적 빨리 올라와서 수확 적기에 이르지 않아도 일정 기준에 맞출 수 있어요. 하지만 과육의 탄력과 풍미는 완전히 익어야만 발현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어요. 소위 대목을 맞춰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가급적 추석 전에 출하하려고 많이 애쓰는데, 당장엔 수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 대표는 제대로 익은 맛있는 과일을 선보이려는 농가의 노력과 함께 좋은 과일을 가늠하는 소비자 인식 변화도 절실하다고 꼬집었다. 아직은 쉽지 않지만 생산자가 자신 있게 포도를 내놓으며 적정 가격을 제시하고, 소비자가 이견 없이 제값을 치르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 팀장은 “현재 영천 지역에서는 기존 품종을 고급화하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소비자 기호에 맞는 새로운 품종 보급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실증시험을 통해 지역 환경에 맞는 우수 품종 선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신 대표의 과원에서도 시범재배하는 <코코볼> <글로리스타> <레드클라렛> <슈팅스타> 등 국내 육성 품종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천은 단순한 포도 주산지를 넘어 한국 포도의 미래를 시험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기후변화와 국제 경쟁이라는 변수 속에서도 안정된 품질 관리와 신품종 개발이라는 두 축이 어떻게 어우러질지 영천 포도의 내일이 더욱 기대된다.
글 서진영 |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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