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 없이 운명에 끌려간 현대사 ‘삐에로’의 진실
- 변절 간첩 처단하란 지령받고
-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임수명
- 임무와 자신의 쓸모 모두 잃고
- 무력해진 상황에 선택한 결말
- 변호사와 관찰자인 소설가까지
- 아픈 현대사 속 삐에로들 이야기
“요즈음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었다. 놀랍고도 한심했다. “세상에 간첩이 없는 나라나 시대가 있었던가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간첩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나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만 나오는 존재가 아니다. 간첩 특히 이중간첩인 반간(反間) 다루기는 ‘손자병법’에도 나온다. 손무는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하물며 세계 최대 미군 기지가 있고 자유와 독재 두 진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공간 한국에 간첩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맹추이거나 음모론이다. 냉전이 아니라고 에스피오나지(첩보 행위)가 없을 수는 없다.

▮‘이상한’ 냉전 시대 간첩소설
나림 이병주는 1977년 간첩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한 편 썼다. 그런데 그 소설에 등장하는 간첩이 좀 특이하다. 전혀 간첩 같지 않은 간첩이다. 독침도 가지지 않았고 총도 없다. 요인 암살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주장하나 아무런 실적이 없다. 3년 서울에서 빈둥거리다 잡힌 것이나 끝내 본명조차 진술하기를 거부한 것 그리고 풍겨내는 분위기의 슬픔 등 간첩 행색이 묘하다.

서둘러 사형되기를 자청하는 모습이 미스터리하고 애처롭다. 제목 ‘삐에로와 국화’부터 상징성이 크다. 소설을 읽는 동안 짠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다가 끝에 가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핑 돌며 멍해진다. 참 독특하게 아픈 사연이다.
간첩 임수명을 강신중 변호사가 국선 변호한다. 국선이지만 강 변호사는 담당 검사를 찾아가 조서를 열람한다. 검사가 “간첩 사건치곤 싱겁죠?”라고 할 정도로 조서 내용은 소략했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은 느낌에 임수명을 면회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변호를 거절한다. 몇 마디 나누고 보니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노동자 출신이라는 조서와 달리 먹물 냄새가 진했다. 둘째, 여느 간첩 같지 않았다.
간첩은 대체로 치명상 입은 개가 주인 바라보는 눈빛으로 변호사에게 애원하는 경우, 온몸이 독기(毒氣) 덩어리로 뭉쳐 저주를 퍼붓는 경우, 변호사를 구워삶으려는 설교형 세 종류인데, 임수명은 “영웅 의식 휘두르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모든 것을 체관(諦觀)한 듯했다. 처음 겪는 경우다. 무언가를 깊이 감추고 있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 강 변호사는 자수 간첩의 수기도 사 읽고 친구 소설가 Y에게 의견도 구한다.
▮기억할 이름, 강신옥

강신중은 실명 강신옥이다. 1세대 대표 인권 변호사로, 이돈명 홍성우 조영래 등과 함께 민변의 전신 정법회를 창립했다. 강신옥은 변호 중 법정에서 구속되기도 한 골기(骨氣)의 투사다. 법정구속 변호사 1호 기록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 날 김지하 등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강신옥은 “법이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나라 걱정하는 애국청년들을 내란죄로 엮어 빨갱이 취급하는 건 사법살인이다”라고 변호했다.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재판받고 싶을 정도다”라고도 했다.
10년 형을 받은 강신옥은 기막힌 항소이유서를 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인용하여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를 편다. 유신헌법은 악법이고 긴급조치는 위헌이니 저항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정연한 논리는 5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강렬하다. 강신옥과 김지하는 이듬해 초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1970-80년대 ‘안티고네’는 대학 연극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강신옥은 민족일보 사건과 신영복 변호 그리고 김재규 변호 등 나림과는 인연이 깊다. 영주 출신인 그의 소백산 산행으로 소설을 시작하는 것에서 보듯 나림은 깊은 신뢰와 정을 표한다. 소설에선 나림과 강 변호사가 친구처럼 나오지만 실상 15세 차이가 나는 망년지우(忘年之友)다.
▮‘소모품’의 깨우침과 헌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나림의 고등학교 제자다. 준수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의 청년 반공주의자가 조총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는 상황에 의분을 느낀 강신중은 판사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고, 나림은 대성통곡 끝에 사형폐지 운동을 한다. 나림은 “사형폐지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라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 소신이 ‘소설 알렉산드리아’와 ‘겨울밤’에 분명하다. 통혁당 사건의 신영복 사형집행을 면하기 위해 나림이 동분서주한 사연은 ‘그해 5월’에 상세하다. 나림은 제종 형 이병두 정보부 차장에게 부탁하고, 외우(畏友) 박희영 교수(나림의 단편 ‘중랑교’의 주인공)의 학병 동료 김계원 참모총장에게도 청을 한다. 이념의 벽을 넘어 재능 있는 청년을 아끼는 나림의 노심초사가 선명하다. ‘지리산’의 하영근이 이념의 벽에 갇힌 박태영과 하준수를 “자중자애하라”며 아끼는 그 어른스러움이 나림에게서 느껴진다.
적대감으로 무장한 지성은 나무람 몇 마디로 나아지지 않는다. 현장에서 부딪치고 깨지며 각성하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과 길을 열어주는 게 어른이다. 다만 시간과 길을 줘도 끝내 성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품성의 문제도 있는 것이다. ‘그해 5월’ 뒷부분엔 나림이 김재규 정보부장을 10·26 전에 만나 대담하는 대목도 있다.
임수명은 소모품 간첩이다. 전향해 자수한 간첩 도청자를 암살하기 위해 남파된 자객이다. 임수명이 서울에 와보니 도청자는 이미 사망했다. 대상이 없어진 자객은 난감하다. 쓸모가 있었다면 애초 지령대로 잠수정을 타고 귀북(歸北)했을 테지만 임수명은 처음부터 임무 완수와 무관하게 소모품으로 버려진 존재다. 그는 나림도 잘 아는 진주의 세위 있는 집안 출신으로 본명 박복영이다. 그 집안 4형제의 운명이 참 기구하다. 하나는 도청자를 숨겨준 죄로 모친과 함께 사형당했고, 셋은 월북했으나 이제 그 하나마저 원수 갚는다고 남파됐다가 또 사형당했다.
신세 진 집안을 풍비박산 낸 도청자는 아마 자살했을 것 같다는 게 수기를 읽은 강신중의 느낌이다. 임수명은 공중에 붕 뜬 상태로 막노동을 하며 3년을 허송한다. 혹시나 하고 찾았더니 버리고 갔던 전처는 재가하여 달동네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전처가 자기를 신고하여 보상금을 타게 하는 것이다. 익명의 편지로 협박하듯 신고하게 했다. 임수명은 강신중에게 자기를 신고한 주영숙의 주소를 알려주며 늦가을에 국화꽃을 전해달라고 당부한다.
▮왜 삐에로이고 어째서 국화일까
얼마 후 강신중은 임수명 사형집행에 참관했던 교도관의 방문을 받는다. 그의 유언이 “자신의 본명 박복영을 강 변호사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늦가을 어느 날 장위동 달동네에서 물어물어 주영숙을 찾는다. “미녀의 잔향(殘香) 같은 것이 서려 있는” 주영숙에게 박복영 이름을 대자 “속수무책의, 그저 낭패를 당한 것 같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얼굴 위에 얼음처럼 굳어 붙었다.” 그리고 “역시”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이해했으나, 인생에서 어떤 클라이맥스를 지켜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샛노란 국화 다발이 내동댕이쳐진 흙 마당에서 나오며 강신중과 Y는 삐에로를 떠올린다. 삐에로는 연극에서 슬픈 얼굴의 분장을 하고 있는 광대다. 슬픈 표정으로 웃겨야 하는 역할이다. 간첩 임수명은 영문도 모른 채 칼춤을 춘 삐에로다. 아니, 나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자기 죽음과 전처 보살피기를 교환한 성공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대체 그런 인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따져도 임수명은 삐에로다. 그의 언행에 긴가민가하면서도 끝내 속은 강신중도 삐에로다. 비극을 넘어 참극(慘劇)을 써야 하는 소설가 Y도 삐에로다.
김완선이 부른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춤과 노래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과연 한국 최초 여성 솔로 가수 밀리언셀러 곡답다.

나림의 간첩 이야기 ‘삐에로와 국화’는 우리 현대사의 슬프고 아픈 한 케이스를 독(毒)을 빼고 희석하여 그린 것이다. 그런 참극을 체험했던 세대는 이제 지나갔다. 지금 세대는 그 세대보다 더 안락하고 안전한가. 문명적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나림의 고견을 듣고 싶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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