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참혹한 침략전쟁…선조 잘못 사죄합니다”
‘광복 80년 한일 평화의 날’ 행사서
조선 장수·왜장 후손 ‘화해의 만남’
왜군 5진과 6진 파병군 후손인
히사다케·히로세 “용서 구한다”에
이순신 후손 이종학씨 “고맙다”

“임진왜란은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잔혹한 침략 전쟁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조선 산하와 백성을 짓밟았던 일본 장수의 후손들이 선조의 만행을 사과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처음 사죄이니 433년 만이다.
일본인 히사다케 소마(24)와 히로세 유이치(70)는 지난 10일 충북 옥천 가산사에서 열린 ‘광복 80주년 한일 평화의 날’에 두손 모아 선조의 잘못을 사죄했다. 평화의 날은 국가보훈부가 주최하고 가산사가 주관했다. 가산사는 임진왜란 위대한 의병장으로 꼽히는 기허당 영규 대사와 중봉 조헌 선생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곳인데, 조선 숙종 때(1675년) 호국사찰로 지정됐다.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은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은 승병·의병을 이곳에서 훈련한 뒤 왜군을 맞았다. 지난 9일은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이 순절한 날인데, 왜장 후손의 사죄로 한이 조금은 풀릴 것”이라고 했다.

두 일본인은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섰던 왜장의 후손이다. 히사다케는 임진왜란 때 충청도를 유린한 왜군 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 소속 쵸소 카베모토사카의 17대 손이고, 히로세는 6진 모리 데루미츠 부대 소속 도리다 이치의 17대 손이다. 도리다는 가라스다로도 불렸다.
두 후손은 충남 금산 칠백의총에 참배하고 가산사에 왔다. 칠백의총은 1592년 음력 8월18일 금산성 전투에서 왜군에 패한 의병·승병 등 700명을 모신 곳인데, 실제 1500명 이상이 묻혔다는 주장도 있다. 후손의 사과를 주선한 김문길 전 부산외대 교수(일본학과)는 “이들의 선조인 왜장과 칠백의총에 묻힌 승병·의병, 영규 대사·조헌 선생 등이 접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사과가 더 뜻깊은 이유다. 이들 선조는 메이지유신 이후 성을 바꿨지만 왜장의 후손이 맞다”고 했다.

김 전 교수와 지원 스님은 지난 2022년 일본에 산재한 이비총(조선인 귀·코 무덤) 위령제를 한 뒤, 이비총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왜장 후손의 사과를 떠올렸으며, 히로세를 통해 히사다케도 알게 됐다. 히로세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출병지인 규슈현 나고야성 학예원 교수를 지냈으며, 부산 신라대에서 한일관계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선조들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뒤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한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힘쓰겠다. 내가 못하면 이 젊은이가 해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사다케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문·방송 등을 통해 선조들의 잘못을 알게 됐다. 용서를 구한다. 오늘 우리의 사과가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 개선의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히로세, 히사다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바다와 산하에서 왜군에 맞섰던 장군·의병장 후손 등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히로세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 덕수 이씨 충무공파 13대손인 이종학(73)씨의 손을 잡고 사죄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 정말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일본 사가현에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모형이 있는데 자주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에 이씨는 “늦었지만 이들의 진심 어린 사과가 고맙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자주 만나 화해하고 교류하길 바란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서예원 진주 목사의 후손 서재덕씨는 “조상을 생각하면 화해가 쉽지 않지만 후손을 위해 마음을 다잡아 이들의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히로세·히사다케는 ‘참회’, 이순신 장군·진주 목사 서예원·무민공 황진 장군 등 조선 장수들의 후손들은 ‘화해’, 왜장과 조선 장수의 후손 모두 ‘평화’ 글씨에 서명하는 행위극도 연출했다. 두 왜장 후손은 자신들이 가져온 술을 가산사 호국충혼탑에 올렸으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사당, 의암 손병희 선생 생가, 독립기념관 등을 둘러 보기도 했다.
이들의 참회와 용서, 화해, 평화를 위한 발걸음에 찬사가 이어졌다. 호사카 유지 광복 80주년 기념위원은 “이들이 참회의 뜻을 밝힌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한일 관계가 화해·평화의 시대로 전환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들의 용기·사과를 계기로 한·일이 더 높은 수준의 우호 협력 관계를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글·사진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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