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시진핑, 그해 경주의 기억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방문을 앞두고, 그가 부주석 시절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9년 12월, 경주의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다.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지만, 천년 고도는 따뜻한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당시 중국 서열 6위였던 시진핑은 특급 의전 대상이 아니었지만, 차기 지도자를 두고 리커창 당시 부총리와 경쟁하던 시점이어서 한국은 그를 국가수반급으로 예우했다. 그 방문은 단순한 지방 일정이 아니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적 인연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공식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경주로 향했다. 외국 정상 대부분이 수도에서 일정을 마치는 관례를 깨고 천년 수도를 찾은 것이다. 경주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신라 문명과 한국인의 정체성이 응축된 공간이며, 그곳을 찾겠다는 결심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공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중국은 수천 년 동안 교류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역사를 써왔고, 경주는 그 만남의 무대였다.
불국사 입구로 들어서는 시진핑의 모습은 취재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의 눈에도 오래 남았다. 서둘러 이동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사찰의 공간을 둘러보고, 돌계단을 밟을 때마다 잠시 시선을 멈추던 그의 표정에는 이곳의 역사에 대한 경의가 묻어 있었다. 이어 반월성 언덕에서 그는 영하의 날씨에도 자신을 위해 농악을 연주하는 지역 예술인들을 향해 "추운데 연주하면 너무 힘들지 않으냐"고 말을 건넸다. 외교의 격식을 넘어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 신뢰를 만들고, 신뢰는 시간이 흘러도 남는다.
그날 시진핑에게 선물로 전달된 책은 『징비록』이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잇는 다리이며, 국가의 선택을 이끄는 나침반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역사를 과시의 도구가 아닌 배움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날 경주에서의 시간은 한 권력자의 과시가 아닌 한 인간의 역사에 대한 존중이었다. 천년 고도에서 마주한 문화의 울림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16년이 흐른 지금, 시진핑은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다시 경주를 찾는다. 그는 과연 그날 겨울을 기억하고 있을까. 알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기억이 국가 간 관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외교가 때때로 계산과 셈법을 넘어, 한 장면의 기억에서 시작되는 이유다. 그날의 따뜻한 바람이 이번 방문에서도 다시 불어오길 기대하는 이유다.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은 단순한 양국의 만남을 넘어선다. 세계 질서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 지금, 대화의 문이 열리는 한 걸음이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진핑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대화 재개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면 그 여파는 한반도를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될 것이다. 그 출발점에 '16년 전 경주의 따뜻한 겨울'이 놓여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 된다.
경주는 천년 전 신라의 수도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로였다. 사신들이 오가고 문물이 흐르던 이 땅은 오래전부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세계를 이어주는 무대였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미, 한·중, 미·중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주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무게를 지닌 도시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권력과 전략으로 움직이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사람의 기억과 공감이 역사를 움직이고 평화를 만든다. 시진핑의 경주 방문이 특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날의 겨울바람처럼 진심은 세월을 넘어 마음에 남고, 그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경주에서 다시 시작되는 외교의 무대가 그 따뜻한 기억 위에 세워지길 바란다. 천년 고도가 품은 역사와 환대가 이번에도 또 하나의 평화를 향한 걸음을 이끌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