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 속 비올레타, 오늘의 인플루언서를 예언하다

[서고우니의 공연장에서]
무대 위의 과거, 객석 속의 현재

편집자주
예술경영 현장을 20년 넘게 지켜 온 서고우니 예술의전당 공연예술본부장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Wiener staatsoper

몇 년 전 오페라 관련 협의차 찾은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에서 본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연출은 연극 '벚꽃동산'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사이먼 스톤. 그는 19세기 사교계의 여인이었던 비올레타를 오늘날의 '인플루언서'로 바꿔 무대 위에 세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비올레타를 추종하는 '좋아요'가 무대 뒤편 스크린에 새겨졌다. 연출력에 대한 평가 이전에 '이런 해석이라면 요즘 세대에게도 통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실제 객석엔 젊은 관객이 비교적 많았다. '시대의 언어'로 담은 고전이 그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셈이었다. 공연장 종사자로서 늘 고민하던 질문의 답이 보이던 순간이었다.

사이먼 스톤 연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무대 위 스크린에 인플루언서로 재해석된 비올레타를 향한 '좋아요' 숫자가 새겨졌다. 필자 제공

최근 국립창극단의 '심청' 역시 새로운 해석과 연출로 한동안 공연 애호가들의 대화와 SNS 피드를 점령했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과거의 콘텐츠들이 오늘의 관객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고전의 서사는 시대를 넘어서는 힘을 지녔지만 기술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속도에 맞춰 가지 못한다면 고전의 위대함조차 관객의 공감을 잃고 사문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생긴다.

전 세계의 공연장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젊은 관객이 필요하다." 예술을 보존하고 확산하기 위해 어떤 나라는 예산을, 또 다른 나라는 후원과 협찬을 동원한다. 그러나 방법이 다를 뿐 목표는 같다. 예술이 현재형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공연을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두 가지 길에 늘 맞닥뜨린다.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개발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이다. 연극, 오페라, 발레, 클래식 음악까지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 "과거의 예술은 현대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또 지금의 창작은 훗날 고전으로 남을 수 있을까."

현대적 재해석으로 화제가 된 국립창극단 '심청'. 국립극장 제공

무대 예술의 가장 큰 매력은 '현장성'이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세상은 현장을 벗어나 더 많은 화면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인 디바이스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극장은 '왜 지금, 여기서 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극장은 원작의 서사를 현재의 이야기로 옮긴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항상 혁신적인 설정과 연출로 고전을 비틀어야 할까. 고전의 생명력을 살리려던 시도가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건 아닐까. 오페라처럼 음악과 극이 공존하는 장르에서는 연출의 급진성이 음악의 호흡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기획자로서 무대와 음악, 서사와 시대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작되는 오늘의 작품들은 어떨까. 현대의 감수성을 백분 담아낸 신작이라도 관객의 지지를 받아 지속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현대(Contemporary)'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부터 어렵고 낯설다는 인식이 생기니, 이 또한 역설이다. 결국 동시대에서 살아남는 것은 시간의 시험을 견딘 고전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공연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예술의 본질과 시대의 흐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언제나 줄타기 같다. 새로운 창작은 늘 위험을 동반하고 흥행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닿으려면 변화의 시도를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이 공연장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무대 위 '현재형 예술'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유다.

예술의전당 공연예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