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복판에 윤동주 기념비…‘육첩방 남의 나라’는 의인을 기억했다

이승훈 특파원(thoth@mk.co.kr) 2025. 10. 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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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유학생활했던 릿쿄대 교정에 기념비
‘쉽게 쓰여진 시’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11일 유족·이혁 주일대사 등 참석해 제막식
도쿄 도시마구 릿쿄대 이케부쿠로 캠퍼스에 세워진 ‘윤동주 기념비’ [도쿄 이승훈 특파원]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되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쉽게 쓰여진 시’는 1942년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올랐을 때 처음 다녔던 릿쿄대에서 쓰였다. 이 시를 담은 윤동주 기념비가 도쿄에서는 처음으로 릿쿄대 교정에 세워졌다.

릿쿄대는 지난 11일 도쿄 도시마구 이케부쿠로 캠퍼스에서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올해 서거 80주년을 맞아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는 일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날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제막식을 보기 위해 윤동주 시인의 조카이자 유족대표를 맡고 있는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시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의 윤동섭 총장,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 이혁 주일대사 등 한일 양국서 150여명이 자리를 지켰다.

기념비는 캠퍼스 내 다치카와기념관 앞에 세워졌다. 기념비는 가로 110cm, 새로 33.5cm 크기다. 아래 제단을 포함하면 높이는 71.5cm 규모다.

11일 도쿄 릿쿄대에서 열린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혁 주일대사,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유족 대표), 윤동섭 연세대 총장, 고하라 가쓰히로 도시샤대 학장,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 [도쿄 이승훈 특파원]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축사에서 “성공회 선교사들이 세운 릿쿄대에는 당시 사제들이 있었고 윤동주 시인은 이들과 활발한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시인이 사제들의 숙소로 가기 위해 지난 곳이 바로 기념비 앞의 작은 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념비는 윤동주 사진과 함께 그가 릿쿄대에서 쓴 ‘쉽게 쓰여진 시’가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졌다. 기념비 한쪽에 QR코드가 있어 이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사이트로 연결된다.

그는 이 대학에 다니면서 이 시를 포함해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등 5편의 시를 남겼다. 이들 시는 릿쿄대의 상징 마크인 백합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편지지에 쓰여 친구 강처중에게 보내졌다. 이 때문에 시가 쓰인 장소와 시기가 비교적 명확하다.

11일 릿쿄대 역사관에서 특별 전시 중인 윤동주 시인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는 유족 대표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오른쪽)와 부인 김영미 씨. 윤인석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큰 조카다. [도쿄 이승훈 특파원]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일본에서는 유학 중 옥사한 시인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져 왔다”며 “이번 기념비가 맑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출발점이 돼 젊은 세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기독교학교인 릿쿄대 문학부를 다녔던 윤동주는 6개월 뒤인 1942년 10월 교토의 또 다른 기독교학교인 도시샤대 문학부로 편입했다.

학교를 옮긴 이유에 대해 릿쿄대의 교련 수업과 학도병 동원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고종사촌이자 평생을 함께해 온 독립운동가 송몽규(1917~1945)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당시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를 다니고 있었다.

윤동주는 도시샤대에 다니던 중인 1943년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해방을 6개월 남겨 두고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11일 릿쿄대 이케부쿠로 캠퍼스에서 열린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에는 굿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지켜봤다. [도쿄 이승훈 특파원]
윤동주를 기리는 시비나 기념비는 교토 인근에 집중적으로 세워져 있다. 도시샤대에는 1995년에 시비가 건립됐고, 윤동주의 교토 하숙집터에도 ‘윤동주 유혼지비’가 있다.

또 도시샤대를 다닐 때 친구들과 소풍하며 마지막 사진을 남긴 교토 우지강 옆에는 2017년 현지 문학 팬과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돼 건립한 기념비 ‘기억과 화해의 비’도 있다.

서거 80주년을 맞아 도시샤대에는 지난 2월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1875년 설립된 도시샤대가 고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날 행사에도 도시샤대의 고하라 가쓰히로 학장이 참석했다.

릿쿄대는 윤동주 기념비 제막식을 전후해 윤동주의 세계를 조망하는 특별 전시행사를 이달 25일까지 열고 있다. 전시회에 참석한 윤동섭 연세대 총장과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전 릿쿄대 교목인 유시경 신부(왼쪽부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도쿄 이승훈 특파원]
릿쿄대에서는 기념비 제막식을 전후해 시인을 그리는 문화행사도 개최했다. ‘윤동주, 릿쿄에 돌아오다-함께 만드는 미래’를 주제로 릿쿄대 이문화 커뮤니케이션학부가 주최했다.

행사는 윤동주의 양쪽 모교인 연세대와 릿쿄대 학생들이 만든 영상 상영과, 영화 ‘동주’ 상연, 시 낭송과 미니콘서트 등이 진행됐다.

행사를 총괄한 이향진 릿쿄대 이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윤동주의 발자취가 닿았던 도쿄 릿쿄대에서 그의 길을 되새기며 우리가 걷는 이 여정이 작지만 뜻깊은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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