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려 변화 의지 충분?… 20대 교제 살인범 감형 이유에 유족들 분통 [사건 플러스]
1심 무기징역 선고했지만 2심 징역 28년 감형
가해자, 대법 상고 "피해자와 결혼 생각" 변명
유족들 "감형 납득 못해… 응당한 죗값 치러야"

"안녕하세요? 지금 여기 ○○○파크 ○○○호예요. 지금 솔직히 말해서, 여자친구가 칼에 찔렸어요."
지난해 8월 3일 늦은 밤 경기 하남시의 한 오피스텔. 김모(당시 26세)씨가 119에 전화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여자친구가 흉기로 나를 찌르려다 자해했다"고 설명했다. 경찰과 구급대원은 신고를 받은 지 6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김씨는 방문을 열어주지 않고 방 안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외쳤다.
비밀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은 탓에 경찰이 세 차례 시도 끝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김씨는 얼굴에 피를 묻힌 채 피해자 임모(당시 27세)씨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씨의 호흡과 맥박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응급실로 옮겨져 처치를 받았지만 심장은 한 번도 뛰지 않았고, 결국 이날 새벽 3시쯤 숨졌다.
사인은 '흉부 자상에 의한 출혈성 쇼크'였다. 임씨의 왼쪽 가슴엔 갈비뼈 사이 근육부터 심장까지 관통할 만큼 흉기로 깊숙이 찌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날 새벽 응급실에서 자초지종을 묻는 경찰에게 김씨는 "(피해자가) 먼저 주방에서 식칼을 가지고 와서 나를 찌르려고 했다"며 "식칼을 쳤는지 팔을 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갑자기 피가 많이 났고, 옷을 벗겨보니 칼자국이 있었다"고 얼버무렸다. 수사 과정에서도 자신의 범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복했지만 김씨는 지난해 9월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에 따르면, 카센터에서 일하던 김씨는 교제한 지 19일째였던 여자친구 임씨가 친한 남성 지인과 30여 분 통화했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하다가 격분해 주방 싱크대 위에 있던 흉기로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씨가 사망한 당일 김씨가 다른 여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살펴보고, 이튿날엔 랜덤 채팅을 통해 새로운 이성을 찾아다니는 등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듯한 행각도 파악됐다.
재판 내내 "직접 범행 안 했다" 주장

1심 재판부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다"며 김씨에게 올해 1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자해 또는 사고사로 벌어진 일이라는 김씨 측 주장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미용실을 열기 위해 한창 준비하던 임씨가 자살할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던 데다가, 사고 당시 임씨를 수습한 응급실 의사, 부검을 맡은 법의관 등이 '외력이 아닌 사고로 발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1심 선고가 끝나고 취재진과 만난 임씨 유족 측은 "항소할까 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털어놨다. 김씨가 실제로 항소장을 제출하며 걱정은 현실이 됐다. 2심 재판부가 내린 결정은 '감형'이었다. 지난 7월 수원고법 형사3부(부장 김종기)는 원심을 파기하고 김씨에게 징역 28년을 선고했다. '김씨의 범행이 맞다'는 원심 판단은 유지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한 정상을 참작했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범행이었고 △범행 직후 심폐소생술을 하고 119 신고를 했으며 △만 26세로 성숙과 변화의 의지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감형 하루 만에 대법원 상고

김씨 측은 2심 선고 다음 날 대법원에 상고했다. 한국일보가 확보한 상고 이유서를 살펴보니, 김씨 측은 사실관계를 새로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임씨가 먼저 식칼을 들었고, 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그의 팔을 쳐서 칼이 꽂히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1·2심 재판부가 이미 물리쳤던 주장을 재차 반복한 셈이다. 흉기와 날의 이음새 부위에서 임씨의 유전자(DNA)가 발견됐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김씨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세상에 없는 임씨를 탓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전에도 피해자의 다소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있었고, 피해자가 먼저 칼을 들고 피고인을 위협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귄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너무 사랑해 결혼까지 생각했다"며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없다고 강변했다.
"나이 어려 감형?" 피해자 남동생 분통

재판이 1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임씨 유족들의 심신은 지쳐만 갔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피해자의 쌍둥이 남동생 임모(28)씨는 "(2심 결과에서) 도대체 납득되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증거와 사실관계가 변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형을 깎아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남동생 임씨는 딸을 잃고 건강이 악화된 부모를 대신해 궂은일을 도맡아왔다. 언론 취재에 응하고, 누나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탄원서 5,000여 장을 받아내 법정에 제출하고, 모든 재판에 직접 참석해 지켜봤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몰두했던 이유는 김씨가 응당한 죗값을 치르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판례상 2심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담당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 지금은 거의 체념한 상태다.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에 탄원서를 받는 일도 포기했다.
김씨는 사건 발생 이후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한 적이 없다. 유족들이 끝내 받아내지 못한 사과는 김씨의 상고 이유서에만 적혀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에게 너무나도 죄송스러운 입장이지만 이 같은 진심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일 뿐이다."
유족들은 김씨의 얘기에 진정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동생 임씨는 "사귄 지 3주도 안 됐는데 결혼을 생각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면서 "혹시 또 감형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우리(유족)가 아니라 판사들에게 사과하는 거 아니겠냐"고 허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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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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