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 '대한제국 마지막 어머니' 황귀비 엄씨와 칠궁의 완성

강소하 2025. 10. 1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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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의미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름하여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이다. 영조·정조·순조를 거쳐 대한제국까지, 후궁의 왕실 제사의 위상 변화를 재조명하는 최초의 전시여서 더욱 그렇다.

이번 기획전은 말그대로, 왕을 낳았으나 왕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을 조명한다. 특히, 이들을 모신 사당을 '칠궁(七宮)'이라 하는데, 조선의 유교적 제례 질서 속에서 종묘에 들지 못한 후궁들을 위해 별도로 조성된 공간이다.

'칠궁'은 ▶인빈 김씨의 저경궁(원종) ▶희빈 장씨의 대빈궁(경종) ▶숙빈 최씨의 육상궁(영조) ▶정빈 이씨의 연호궁(진종) ▶영빈 이씨의 선희궁(장조) ▶유빈 박씨의 경우궁(순조) ▶황귀비 엄씨의 덕안궁(영친황)을 통칭한다. 원래는 각각 흩어져 있던 사당을 1908년 육상궁 경내로 통합하고, 1929년 덕안궁까지 옮기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일제강점기 무리한 합사와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축소된 칠궁을 넘어, 그 안에 깃든 후궁들의 삶과 역사적 층위를 복원하고자 했다"는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의 설명 만큼이나 특별한 이 전시의 면면을 도록을 중심으로 세심히 살펴보고자 한다. 연재는 총 5부로 구성된 전시의 흐름을 따른다. [편집자주]
 

⑤후궁 중 최상이자 황후 버금가는 지위 인정받은 황귀비
1903년 11월 7일 순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하는 의례를 한글로 기록한 '책황귀비 홀기'.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황귀비 엄씨는 1859년(철종 10) 6세의 나이로 입궁했고,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됐으나 고종의 승은을 입은 후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으면서 1885년(고종 22) 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부름을 받아 재입궁,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8일 째에 44세의 나이로 영친왕 이은을 낳았고, 귀인·순빈을 거쳐 1901년 황제의 후궁인 순비로 승격되며 '경선(慶善)'이란 궁호를 받았다.

1903년에는 황제의 후궁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인 황귀비에 올라 황후의 빈자리를 대신했는데,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11세의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순조의 명분은 '어진 이를 선택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결정에는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는 황귀비의 개입과 일제의 지원이 작용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이토 히로부미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고, 결국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됐다.
 
순헌황귀비 엄씨 장례 행렬 사진엽서, 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사진=학국학중앙연구원

◇황귀비의 공식 사인은 장티푸스
1910년 8월 20일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격하됐고,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왕세자가 됐고, 황귀비는 귀비로 불렸다. 그리고 다음해 7월 20일 황귀비는 덕수궁 즉조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엄비는 지난 10일경부터 감기 비슷이 미령하여 한일인신의의 진료를 받은 바 있으나 비밀히 약이(약물치료)는 소홀히 하고 기도만 전(專)히 하여 왔다 하며 병증은 장티푸스인 듯하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황귀비의 부음을 듣고 영친왕은 급히 귀국했지만, 전염을 이유로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사망한 지 13일 만에 황귀비는 영휘원에 안장됐다.
황귀비 엽서 사진, 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여성이 세운 교육기관의 시초
황귀비는 여성 교육의 부재를 깊이 염려하며, 여학교 설립과 여성 교육의 진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06년에는 사재를 들여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설립을 후원했다. 같은 해 7월, 경복궁에서 명신여학교의 개교를 기념, 학생과 교직원을 격려하는 축하연을 열기도 했다.

황귀비가 설립한 여학교는 한국 여성이 세운 교육기관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1929년 육상궁 영역에 덕안궁을 포함한 칠궁이 배치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향사이정(享祀釐正)' 반포, 덕안궁 이건... 칠궁으로 통칭
1908년 7월 23일 통감부의 간섭이 심화되는 가운데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正)'이 반포되면서 저경궁·대빈궁·연호궁·선희궁·경우궁이 육상궁 영역에 합설됐다. 이후 1929년 덕안궁이 이건되며 칠궁으로 통칭된다.

칠궁은 육상궁과 그 서편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한 4개의 정당(正堂)으로 구성됐다. 육상궁의 정당에는 숙빈 최씨와 정빈 이씨의 신주가 함께 모셔져 있고, 가장 서쪽에 있는 저경궁에는 인빈 김씨의 신주가, 대빈궁에는 희빈 장씨의 신주가 안치돼 있다.

이어서 선희궁과 경우궁을 합사해 영빈 이씨와 유빈 박씨의 신주를 하나의 정당에 봉안했고, 황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덕안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는 현재의 칠궁 구조와는 차이가 있는데, 1968년 창의문로의 확장에 따라 칠궁의 서편이 축소, 각 궁이 동편으로 이전되고 덕안궁은 선희궁·경우궁의 남쪽으로 재배치됐기 때문이다.
 
순화원으로 사용된 경우궁의 모습(매일신보, 1920년 8월 23).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 칠궁의 시간과 공간
이러한 궁의 운영은 고종 대 합설과 이건으로 인해 변화되기 시작했고, 제사 공간의 본격적인 통합 추진 후 의례 공간으로서의 위상은 크게 훼손됐다. 특히, 폐궁 처리된 각 궁의 공간은 일제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대시설로 전용되기에 이른다.

▶저경궁 터에는 1927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대빈궁 터에는 1913년 기상청인 경성측후소 ▶선희궁 터에는 1912년 고아원인 제생원양육부가 설립됐다. 또, ▶경우궁 터에는 1910년 전염병 환자 격리 수용시설인 순화원 ▶이건 전의 경우궁 터 역시 오물처리를 위한 위생실행부가 설치됐고 ▶덕안궁 터에는 1935년 예술공연 시설인 경성부민관이 건립됐다.

해방 이후 칠궁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문화재 관리 업무를 맡은 문교부 문화국이 칠궁을 관리했고, 1961년 10월부턴 문화재관리국이 발족, 칠궁 관리 업무를 맡았다.
 
현재 칠궁 제향 모습.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2025년 청와대 재이전 전망... 칠궁의 새로운 변화 주목
칠궁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건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10월이다. 그러나 1968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대통령 경호 문제가 제기되며 관람이 금지됐다. 이후 2001년 11월 칠궁은 다시 개방됐지만, 청와대 인근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제한적 관람이 허용됐다.

그러다가 2022년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청와대가 개방, 칠궁의 관람도 자유롭게 됐다. 특히, 2025년 청와대가 재이전할 것으로 알려지며 칠궁의 새로운 변화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선후기의 역사적 사건이자 효를 실천하는 왕실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칠궁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버금가는 제향 공간이자 중요한 국가유산이 아닐 수 없다.
1903년 순비 엄씨의 황귀비 책봉을 위해 제작된 금책을 탑본해 수록한 첩이 '황귀비 금책문 탑본'이다. 사진은 '진봉 황귀비 의궤' 반차도 중 금책을 실은 요어.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이번 기획전은 2026년 6월 26일(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15인 이상 단체관람의 경우 사전 신청을 통해 전시 안내를 진행한다. 문의 031-730-8820

강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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