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View] 20년 만의 APEC 외교 기회… 李, 주연 아닌 조연 될 우려
시진핑 국빈 방문 무산
한미일 회담도 불투명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20여 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2005년 부산 APEC 이후 20년 만에 한국이 다시 APEC을 주최하지만, 흔치 않은 외교적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중 갈등의 여파와 명확한 외교 좌표의 부재, 전략 부재로 ‘이재명 외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1일 개막하는 APEC 참석에 앞서 일본을 먼저 찾는다. 그는 퇴임 결정을 내린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후임이 확정되기도 전에 27일부터 2박 3일간 일본을 방문하기로 확정했다.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를 비롯, 누가 차기 총리가 되든 정상회담을 갖겠다며 일본을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반면 한국 방문 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현재로서는 29일 오전에 서울에 도착 후, 이날 저녁 한국을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APEC 부속 회의에 잠깐 얼굴을 비출뿐, 본 회의는 참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짧은 1박 2일 체류’는 우리 정부의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3500억달러 대미(對美) 투자 계획이 구체화되지 않을 경우, 회담이 형식적인 약식 회동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 정상 간 만남 자체가 무산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정부 관계자들은 “APEC까지는 협상 진전이 어려울 것”이라며 미리 한미 정상회담 기대치를 낮추고 있다. 이례적인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보다 APEC을 계기로 추진 중인 미·중 정상회담 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가능성에 쏠려 있다. 이 대통령이 사실상 외교 무대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트럼프, 총리 확정 안됐는데 사흘 방일 결정… 한국은 약식회담 예상
한중 정상회담의 전망도 밝지 않다. 정부는 11년 만에 방한하는 시진핑 주석을 국빈(國賓)으로 초청, ‘관계 복원’을 목표로 했다. 주한 중국 대사관이 한때 서울 신라호텔을 통째로 예약해 기대감을 높였지만, 곧바로 예약을 취소하며 국빈 방한은 물론 서울 방문 자체가 어렵게 됐다. 경희대 주재우 교수는 “시 주석은 한중 관계 악화의 원인인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사드) 문제에 대한 확실한 ‘선물’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이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생각해 시 주석이 국빈 방문할 명분이 없다”고 했다. 시 주석이 대만, 공급망 문제에서 한국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40분간 통화했지만, 한중 정상회담 형식과 의제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양국 정상의 만남도 APEC 회의장 주변에서 이뤄지는 짧은 약식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과의 관계도 불안 요소가 커졌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자민당 총재는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강경한 우익 성향의 인물이다. 독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민감한 사안에서 과거 혐한(嫌韓)적 발언을 해온 그가 언제 다시 강경 노선으로 회귀할지 모른다. 우리 정부는 다카이치 총재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조차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한국에 모처럼 미국과 일본 정상이 같은 시기에 방문하지만,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의제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처한 상황은 2005년 부산 APEC 때와 대조적이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경주에서 열린 11·17 회담에서 ‘한미 동맹과 한반도 평화에 관한 공동선언(경주선언)’을 발표하며 북핵과 인권 문제에 대한 공동의 입장을 정리했다. 두 정상은 사이가 좋지 않고, 숱한 이견이 있었지만 부부 동반으로 불국사를 함께 둘러보기도 했다.
한중 관계도 성과가 있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같은 해 11월 16일부터 이틀간 국빈으로 방한했다. 노 대통령과 후 주석은 외교 장관간의 핫라인 설치와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심화에 합의했다. 한중 수교 15주년을 맞는 2007년을 ‘한중 교류의 해’로 지정한 것도 이때였다.
APEC을 앞두고 국제적 관심이 미·중 정상회담과 트럼프–김정은 회동 가능성으로 쏠리면서, 이 대통령의 존재감은 한층 옅어지고 있다. 이 대통령이 미·중 갈등 속에서 길을 잃은 사이에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주도적으로 외교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김정은은 오늘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쌍십절)을 맞아 중국과 러시아의 2인자를 초청하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은 중국의 리창 총리와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과 열병식장에 나란히 서서 ‘북·중·러’ 연대를 과시한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안보 분야의 한 전문가는 “이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내세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중 양국 모두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외교 고립’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 듯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 관련,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면서도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이 나온다. “한미 관계와 남북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날 경우, 주한 미군 문제 등에 대해 무슨 대화를 나눌지 모르는데, 우리가 관전자로 머물러야 하느냐”는 것이다. 경주 APEC을 둘러싼 ‘빅 이벤트’들이 주변국 정상의 일정에 종속된다면 이 대통령에게는 ‘기회의 장(場)’이 아니라 ‘외교의 위기’로 기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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