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도 달린다… ‘레테 특강’ 듣는 유치원생들

“빨리 뛰자, 수업에 늦겠어!”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자 한글날인 9일 오전 9시 5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영어 학원 앞은 평일과 다를 게 없었다. 상체만 한 손가방을 든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붙잡고 학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이어 영어 교재를 오른손에 든 남자아이가 눈을 비비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이들은 모두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인 대여섯 살 남짓한 아이들이었다. 강남의 최상위권 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입학 시험인 ‘레벨 테스트(레테)’ 준비를 위해 이곳에 왔다. 영어 학원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별도의 사교육을 듣는 것이다. 학원 앞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다들 1월부터 레테 준비를 시작했다는데 우리 아이는 여름방학에야 시작했다”며 “추석에도 놀리지 않고 공부시켜야 다른 애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최장 열흘간 이어지는 이번 추석 연휴 강남 학원가 곳곳은 ‘7세 고시(만 5세)’ 열풍으로 뜨거웠다. 미취학 아동들의 영어 유치원 졸업을 앞둔 매년 10~11월이 되면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학 시험 전쟁이 치러진다. 이른바 ‘빅5·7’으로 꼽히는 강남의 유명 초등 영어 유치원과 학원들이 다음 학년도 수강생을 미리 뽑기 위해 이 기간 입학 시험을 치르기 때문이다.
유명 영어 학원들은 이달부터 두 달여간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듣기·쓰기·어휘·회화 등으로 과목을 나눠 시험을 본다. 미국 초등학교가 치르는 영어 평가 수준과 맞먹을 정도로 난도가 높다. 서울 강남의 한 영어 학원 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추석 기간엔 문법, 비문학 독해, 작문 등 과목의 기출 문제를 총정리하고 모의 시험을 봤다”며 “입학 시험 직전에 예상 문제를 쭉 훑을 수 있어 인기가 많다”고 했다.
한 수업에 적게는 3~4명, 많게는 10여 명으로 꾸리는데 가격은 시간당 5만~6만원 선이다. 개천절(지난 3일)부터 한글날까지 이어지는 연휴 기간 진행되는 수업을 모두 들으면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성인 소규모 영어 회화 수업료의 배가 넘는다.
만 4세 이하 아이들까지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해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이른바 ‘4세 고시’까지 등장한 것이다. 4세 고시 수업을 운영하는 학원들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영어로 쓰고, 알파벳 대·소문자를 정확히 읽고 쓰도록 훈련시킨다. 그러나 한글도 제대로 못 하는데 영어를 배우기 버거워하는 아이가 많다고 한다.
대치동에 밀집한 ‘빅5’ 학원은 “고등학교까지 무난하게 이어지는 교육과정” “미국 동부 프렙스쿨(prep school·명문 사립 고등학교)을 지향하는 교육 방식”이라는 문구로 광고하고 있다. 선행 학습이 빨라야 특목고∙자사고는 물론 의대 등 대학 입시에 유리할 것이라며 학부모들의 조바심을 부추기고 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영어 학원 관계자는 “영어 유치원·학원의 입학 시험 열풍이 대치동이나 목동 등 서울 주요 학군지뿐 아니라 수도권 등 전국으로 퍼진 지 오래”라고 했다.
지난 3월 교육부의 ‘2024 유아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만 6세 미만 영유아 가구 부모 1만3241명이 지난해 7~9월 지출한 사교육비 총액은 8154억원이었다. 사교육 참여율은 47.6%로, 영유아 2명 중 1명꼴로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작년 강남 3구 9세 이하 아동의 우울증, 불안장애 건강보험 청구 건수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평균인 291건을 한참 웃돌았다. 송파구 1442건, 강남구 1045건, 서초구 822건이었다.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어린 나이부터 하는 영어 사교육을 정부가 직접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7세 고시 등 극단적 경쟁을 부추기는 조기 사교육에 대한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했다. 같은 달 학원 단체인 한국학원총연합회 전국외국어교육협의회도 유아 영어 학원의 입학 시험을 전면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지난달 교육부는 ‘영유아 사교육 대책팀’을 신설해 실태 조사에 나섰다.
☞4세·7세 고시
초등학교 입학 전인 일곱 살 아이들이 유명 영어 유치원·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입학 시험. 유명 학원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해 ‘고시’라는 말이 붙었다. 영어 유치원에 입학하려는 만 4세 이하 아이들까지 영어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 ‘4세 고시’라는 표현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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